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가을 탔던' 예술가들… 화폭에 쓸쓸함 녹였죠

입력 : 2025.10.13 03:30

가을 풍경

한가위를 지내고 나니 여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듯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바람이 서늘하고, 피부에 닿는 햇살은 부드러워졌어요.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바쁘게 일하던 농부가 첫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며 이웃과 나누는 가을에는 세계 곳곳에서 우리의 한가위와 비슷한 축제가 열립니다. 또 이 무렵 도시에서는 '가을을 타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황금빛 가로수 아래를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고 싶어지는 거죠. 낙엽은 건조해서 부스러지지만, 반대로 사람의 감성은 촉촉해지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랍니다. 화가 중에도 가을을 타느라 그랬는지 마음속에 깃든 쓸쓸한 기분을 화폭에 담은 이가 있어요. 오늘은 10월을 주제로 그린 풍경을 보면서 가을이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지 음미해 볼까요?

'베리 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 실린 삽화 '10월'. 이 책은 개인적인 예배를 위해 사용한 기도서로,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과 채색 삽화가 수록돼 있어요. /콩데 미술관
'베리 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 실린 삽화 '10월'. 이 책은 개인적인 예배를 위해 사용한 기도서로,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과 채색 삽화가 수록돼 있어요. /콩데 미술관
16세기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가축의 귀환'. 황량한 갈색조로 가을을 표현했어요. 가을은 겨울과 다음 해를 준비하는 계절이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빈 미술사박물관
16세기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가축의 귀환'. 황량한 갈색조로 가을을 표현했어요. 가을은 겨울과 다음 해를 준비하는 계절이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빈 미술사박물관
겨울을 준비하는 농부

<작품 1>은 현재 프랑스에 속하는 부르고뉴 공국에서 궁정 화가로 활동하던 랭부르 형제가 그린 '10월'입니다. 랭부르 형제의 대표작인 '베리 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 들어 있는 그림인데요. 이 책은 베리 공작이라는 사람이 주문한 개인용 기도서입니다. 이 책은 1월부터 12월까지 계절의 변화를 그린 달력 그림으로 유명하죠.

그중 '10월' 그림에는 중세 파리에 있었던 옛 루브르성을 배경으로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림 윗부분의 반원 에는 날짜를 나타내는 숫자와 별자리(천칭자리·전갈자리)가 있고, 태양 마차가 굴러갑니다. 아랫부분엔 들판이 보여요. 왼쪽에는 말이 끄는 썰매형 농기구로 흙을 고르는 사람이 보이고, 오른쪽엔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죠. 가운데에는 활을 든 허수아비도 세워져 있어요. 씨앗을 까먹는 새를 쫓기 위한 것이죠.

가을 파종은 내년 봄을 위한 준비입니다. 겨울에 땅이 얼기 전에 씨를 뿌려야 씨앗이 겨울 동안 땅속에서 숨 쉬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거든요. 농부에게 가을은 한 해의 일을 끝내는 것뿐 아니라 다음 해를 준비하는 시작이기도 했던 거죠. 이렇듯 랭부르 형제의 달력 그림은 매달 조금씩 달라지는 하늘의 별들과 땅을 나란히 대비시켜 보여주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일과를 세밀하게 묘사했죠. 농경과 천문을 연결 짓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표현한 그림이랍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도 달력 그림을 남겼는데, 두 달씩 묶어 총 6점을 완성했습니다. <작품 2>는 '가축의 귀환'이라는 작품이에요. 10월과 11월에 해당하는 풍경으로, 산비탈을 따라 소 떼를 몰고 마을로 돌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색깔의 소들이 보이네요. 초원에서 풀을 뜯다가 이제 우리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은 먹구름으로 덮여 있고, 나뭇가지는 잎을 거의 다 떨어뜨렸어요. 황량한 갈색조의 분위기는 겨울이 곧 닥치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해요. 자유롭게 활동하던 때는 지나고 다음 해 시작을 위한 쉼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이 가을인 거죠.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의 작품 '10월'. 작가의 연인이었던 뉴턴 부인을 모델로 그렸습니다. /몬트리올 미술관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의 작품 '10월'. 작가의 연인이었던 뉴턴 부인을 모델로 그렸습니다. /몬트리올 미술관
영국 화가 존 밀레이의 '낙엽'이에요. 그림에서 낙엽은 죽음과 쇠락을 상징하는데, 황금빛 낙엽 더미 주위에 있는 소녀들의 시선이 대비를 이룹니다.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영국 화가 존 밀레이의 '낙엽'이에요. 그림에서 낙엽은 죽음과 쇠락을 상징하는데, 황금빛 낙엽 더미 주위에 있는 소녀들의 시선이 대비를 이룹니다.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쓸쓸함, 그리고 낙엽

노랗게 물든 마로니에잎과 낙엽으로 가득한 배경 속에, 한 여인이 살짝 몸을 돌린 채 서 있습니다. <작품 3>의 제목 역시 '10월'입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가 그렸지요. 검은 모자에 어두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은 마치 어디론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눈길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만큼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겨드랑이에 낀 작고 낡은 책이 보이는데, 마치 여인의 사연이나 추억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림 '10월'의 실제 모델이 된 사람은 화가가 깊이 사랑했던 캐슬린 뉴턴이라는 여인입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결핵에 걸려 이 그림이 완성되고 몇 해 후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그림에서 여인은 풍성한 치맛자락을 날리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이후 티소의 그림에서 뉴턴은 기운 없이 늘어져 있고 창백한 병색이 두드러집니다. 실제로 화가가 겪었던 사랑과 이별 때문일까요. 작품 '10월'도 어쩐지 쓸쓸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작품 4>는 19세기 영국 화가, 존 밀레이가 그린 '가을 낙엽'이에요. 노을이 깔린 저녁 하늘 아래, 네 소녀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낙엽을 모아 태우고 있습니다. 화면 왼편의 두 소녀는 커다란 바구니에서 낙엽을 쏟아내고, 오른쪽의 두 소녀는 조용히 지켜봅니다. 타오르는 불꽃은 화면에 보이지 않지만, 소녀들의 발그레한 얼굴을 보면 불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화염이 삼킨 낙엽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낙엽은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그 흙에서 다시 새순이 돋아나죠. 밀레이의 '가을 낙엽'은 당시 처음 소개되었을 때 '매우 시적인 그림'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단순한 계절 풍경을 넘어 죽음과 삶의 순환에 대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죠.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