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최장 10일 '황금 연휴'? 원래는 하루만 쉬었죠

입력 : 2025.10.02 03:30

추석

1972년 추석,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고 밤늦게까지 옛 서울역 앞에 줄을 선 귀성객들의 모습이에요. /서울역사박물관
1972년 추석,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고 밤늦게까지 옛 서울역 앞에 줄을 선 귀성객들의 모습이에요. /서울역사박물관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 다가왔어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레는 날이지요. 특히 이번 추석은 최장 10일간 쉴 수 있는 '황금 연휴'라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데 추석은 언제 시작됐을까요? 오늘은 추석의 역사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추석

추석은 아주 오래된 명절입니다. 그 시작은 신라의 잔치인 '가배'였다고 해요. 당시에는 여인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천을 짜는 길쌈 대회를 하고, 모두 함께 술과 음식을 나누며 즐겼습니다. 이 가배가 변해서 '한가위'의 '가위'라는 말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풍습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조선 사람들은 "추석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여겨왔습니다.

흥미롭게도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에도 추석과 비슷한 명절이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중추(中秋)'라고 부르는데, 가을의 한가운데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왜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에 명절을 즐겼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을은 1년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계절이기 때문이에요. 옛날 농경 사회에서는 가난한 집이라도 이 시기만큼은 먹을 것이 넉넉해 떡과 술을 빚어 나누며 풍요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추석은 중국의 중추와 달랐습니다. 우리 추석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바로 성묘, 즉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었죠. 고려 말의 학자 이색은 추석이 되면 성묘를 가야 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를 보면 적어도 고려 말부터는 추석 성묘 풍습이 있었고, 이것이 조선 시대 내내 이어져 내려온 것을 알 수 있죠.

재미있는 점은, 조선의 유학자들 중에는 추석 제사를 제대로 된 풍습이 아니라고 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율곡 이이는 "추석은 바른 명절이 아니라 속절(속된 명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잘못된 명절은 사치로 흐를 수 있다"며 비판도 했어요. 유학자들은 '예기' 같은 유교 경전에 나와 있어야 명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추석이 되면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조상의 묘를 찾았습니다. 유학자들이 뭐라고 비판해도, 실제로는 전통과 관습의 힘이 더 강했던 거죠.


피란 중에도 제사를 지냈대요

요즘은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지 않아요. 지내더라도 약식 제사인 차례를 지내거나, 아니면 이마저도 아예 지내지 않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엔 조상이 돌아가신 기일 외에도 제사를 올리는 네 가지 큰 날이 있었습니다. 바로 설날, 단오, 추석, 동지예요. 이렇게 하면 1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내는 셈인데, 요즘 기준으로 보면 꽤 많다고 느껴질 겁니다. 게다가 제사는 보통 4대조, 즉 증조부모까지 지냈습니다. 집안에 특별한 예절이 더해지면, 한 집에서 1년에 십수 번 이상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요. 이런 원칙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점 더 지켜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사 횟수가 아닙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제사는 그렇게까지 괴로운 행사가 아니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차린다는 마음이 강했거든요. 곽주의 아내 하씨 무덤에서 발견된 편지 중에는 아버지의 제사에 참석 못 하자 "제사를 못 지내다니 내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지은 거야?"라는 딸의 하소연이 담긴 것도 있지요.

심지어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피란을 다니는 와중에도 제사를 거르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세상을 떠난 가족들에게 음식을 차려주는 것이 제사의 본질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가족이 직접 제사를 지내는 게 가장 좋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정이 벌어지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제사 비용으로 자신의 재산을 떼어주기도 했죠.


연휴 길어지며 귀성객도 늘어났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화·도시화가 진행되자, 추석 풍습도 크게 달라집니다. 1920년 무렵부터 도시 근교에 공동묘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요. 서울에서는 이태원, 청량리 근처 망우리, 미아리 등이 대표적인 공동묘지였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처음 경험하는 공동묘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여러 사건이 벌어졌답니다. 추석이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성묘를 와서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족들이 한데 모이다보니 공동묘지로 가는 길은 극심한 교통체증을 겪었고, 다른 집 무덤과 헷갈리거나 서로 시끄럽다고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현대에 새로 나타난 추석의 풍습은 귀성입니다.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급격히 도시화되면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큰 도시로 모여들었지요. 그래서 추석이 되면 시골에 남아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대부분 고향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는 추석 기차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서울역이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고향에 꼭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역으로 몰려든 것이지요. 특히 1968년 추석에는 기차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좌석은 물론이고 객실 선반에까지 사람들을 태우고 달리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추석은 1949년 처음 국가 공휴일로 지정됐습니다. 이때는 추석 당일만 휴일이었지만 1986년에 2일로, 그리고 1989년에 3일 연휴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렇듯 쉬는 날이 늘어나고, 이 시기 자가용도 보급되면서 자연스레 귀성객도 늘어나게 됐지요. 고속도로 정체도 일상이 됐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1990년대에는 고향에 살고 있는 부모가 도시에 사는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역귀성' 현상도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됐답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며 2000년대부터는 추석 연휴에 해외로 여행을 가는 사람도 많아졌지요.

현대 사회에 이르러 추석, 그리고 제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추석 풍습은 몇 번이나 변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가족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한 작가·'한잔 술에 담긴 조선' 저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