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고향 떠나 아프리카에 병원 세운 의사, 지붕도 없는 진료실에서 환자 돌봤죠
입력 : 2025.09.29 03:30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휴머니즘'의 대명사로 알려진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자이자 목사였고, 오르간 연주까지 잘했지요. 그런데 서른 살이 되던 1905년, 안정된 신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새롭게 의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난 뒤, 그곳으로 가 직접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죠.
의사가 된 그는 1913년 고향인 독일을 떠나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갔습니다.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90세까지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지요. 병원 운영비는 슈바이처의 뜻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후원해 줬어요. 이 책은 그가 의료 봉사를 막 시작한 초기 몇 년 동안 겪은 일들을 정리해 펴낸 겁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진료실조차 없었다고 해요. 지붕조차 없는 집 앞 공터에서 진료를 하다가, 이후 닭장으로 쓰이던 곳을 진료실로 꾸몄답니다. 게다가 방문 진료를 하려면 아프리카의 무서운 야생동물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도 몇 시간이나 더 걸리는 우회로를 이용해야 했지요.
슈바이처는 매일 평균 30명에서 40명을 진료했습니다. 원주민들은 말라리아, 수면병, 열사병부터 벼룩이 살을 파고들어 생기는 농양을 많이 앓았습니다. 슈바이처와 그의 아내는 늘 감염의 위험에 시달렸습니다. 슈바이처 한 사람이 종합병원의 모든 의사를 합친 것 같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에서 식민지로 가던 보급선이 크게 줄었고, 슈바이처 역시 물자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슈바이처는 "부족한 물자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책의 인세와 강연과 연주회 등으로 모은 돈으로 1924년 랑바레네에 새 병원을 세웠습니다.
슈바이처는 자신이 사방 수백 킬로미터 안에서 환자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힘든 수술 뒤에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피부색이나 나라를 넘어 인간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슈바이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곳곳에 의사를 한 명씩 보낸다고 세계의 비참한 현실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슈바이처가 답했습니다. "의사 단 한 명이라도, 보잘것없는 약품이라도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어요. 나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인간성을 믿으니까요."
슈바이처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후원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를 도우려 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자원했습니다. 그는 '인류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환자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에서 인류가 겪는 고통을 고치는 의사가 된 슈바이처는 의사 이상의 의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