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판 검찰 개혁? 왕권 남용으로 끝난 정치극이었죠

입력 : 2025.09.25 03:30

연산군과 '사화'

인기 TV 드라마 '폭군의 셰프'를 둘러싸고 최근 논란이 일었어요. 연회에서 조선 왕과 명나라 사신이 같은 높이에 앉아 있는 장면 때문입니다. 네티즌들이 "역사 왜곡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하자, 드라마 작가가 조선 시대 공식 예법서 '국조오례의'를 인용하며 "제대로 고증한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학자들은 대체로 작가의 말이 맞는다는 반응입니다. 조선 왕은 실질적인 독립국의 군주였지만 형식적으로는 중국 천자(황제)가 책봉한 제후였기 때문에 중국 사신을 우대했다는 것이죠.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사신은 황제의 아바타 같은 존재였고 의례상 조선 왕과 동등한 위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이것은 당시 외교상의 프로토콜(의전)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현재의 우리가 불쾌해할 필요는 없겠죠.

'폭군의 셰프'에 등장하는 '연희군'이라는 조선 왕은 10대 임금 연산군(재위 1494~1506)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조선 임금 중 호칭이 '군'으로 끝나는 임금은 중간에 쫓겨났단 의미입니다. 연산군과 15대 광해군이죠. 다만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밀려난 6대 단종은 '노산군'이란 이름으로 강등됐다가 숙종 때 복권됐습니다. 오늘은 '폭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연산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즉위 4년 만에 벌어진 첫 '사화'

연산군은 1476년 경복궁 교태전에서 성종 임금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왕실에서 오랜만에 나온 적장자(정실 부인이 낳은 맏아들) 출신의 임금인 셈인데, 조선 임금 27명 중 적장자 출신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까지 7명뿐이었습니다. 연산군은 12년을 세자로 있으면서 왕실의 정통 교육을 받았고, 즉위 초에는 종종 현명함도 보인 멀쩡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년)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무오사화가 일어나며 상황은 달라집니다. 사화(士禍)란 조정의 신하와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당한 일을 말해요.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때의 일을 기록한 실록이 '성종실록'인데요. 그 편찬 과정에서 김일손이라는 사관이 저명한 유학자 김종직(1431~1492)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실록의 원고)에 포함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던 겁니다.

'조의제문'은 기원전 206년 중국에서 항우에게 시해된 초나라 군주 의제를 애도하는 글이었는데 사실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낸 것을 비판하는 속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은 크게 노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죠. 김종직의 문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사형이나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화를 면한 선비들이 모이면 "바야흐로 걸주(桀紂)의 세상일세"라며 한탄했다고 해요. 걸과 주는 각각 중국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유명한 폭군들이었어요.

조선시대 ​성종 때 일을 기록한 '성종실록'.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세조와 관련된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무오사화'가 일어났죠.
조선시대 ​성종 때 일을 기록한 '성종실록'.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세조와 관련된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무오사화'가 일어났죠.
경복궁 경회루 전경. 연산군은 경회루를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다고 해요.
경복궁 경회루 전경. 연산군은 경회루를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다고 해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연산군시대금표비'. 금표비는 왕실에서 사냥과 군사 훈련 등을 위해 설정한 출입 금지 구역을 표시한 비석이에요. 연산군은 백성의 출입을 막고 금표 구역 안에서 유흥을 즐겼다고 합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연산군시대금표비'. 금표비는 왕실에서 사냥과 군사 훈련 등을 위해 설정한 출입 금지 구역을 표시한 비석이에요. 연산군은 백성의 출입을 막고 금표 구역 안에서 유흥을 즐겼다고 합니다.
서울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과 아내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예요. 연산군 묘는 유배지였던 강화도에 있었는데, 훗날 거창군부인이 중종에게 요청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어요.
/국립고궁박물관·국가유산청
서울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과 아내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예요. 연산군 묘는 유배지였던 강화도에 있었는데, 훗날 거창군부인이 중종에게 요청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어요. /국립고궁박물관·국가유산청
어머니 복수가 빚은 '대숙청극' 갑자사화

그런데 더 큰 변고가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였어요. 연산군의 친모인 윤씨는 몰래 독약을 품고 거짓 문서를 만들었다는 등의 이유로 왕비가 된 지 3년 만에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폐비(물러난 왕비) 윤씨'라 불리죠. 다시 3년이 지난 1482년 임금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연산군이 자기 어머니를 모함했다며 아버지 성종의 후궁 두 명을 죽였고, 할머니인 대왕대비(인수대비)를 위협한 끝에 한 달 뒤 할머니가 별세하는 참사를 빚었습니다. 신하들 중 조금이라도 관련돼 보이는 사람들에겐 모두 벌을 내렸습니다.

무오사화 때만 해도 벌을 받은 사람은 51명이었는데 갑자사화 때는 4배가 넘는 239명이 처벌됐고 1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관참시(사후 처형)를 당했습니다. 연루된 가족까지 합하면 3000명이 처벌받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왕권에 의한 끔찍한 학살이나 다름없었죠. 무오·갑자사화와 1519년(중종 14년) 일어난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를 조선의 '4대 사화'라고 합니다.

어쩌면 일종의 '실패한 검찰 개혁'?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뒤늦게 알자마자 분노해서 대숙청극을 벌였던 걸까요? 그게 아니라 이미 즉위 직후에 그 사실을 인지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10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서 복수극을 펼친 것이 되죠.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이것이 '친모 음해'를 빌미로 펼친 조직적인 정치 투쟁이었다는 점입니다. 종래 연산군 때의 사화를 세조의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권층인 '훈구파'와, 새로 중앙에 진출해 이에 맞선 '사림파' 간의 충돌 결과 사림파가 대거 희생된 사건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 하버드대의 윌렛 와그너 같은 학자들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별 차이가 없다'는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을 쓴 조선 전기 연구자 김범 박사는 "연산군 때의 사화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아니라, 삼사(三司)를 억압하기 위한 정치 투쟁"이라 말합니다. 관리 감찰과 탄핵, 임금에게 직언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헌부·사간원·홍문관(삼사)의 위상이 커지자, 왕권이 제약당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연산군이 일부 대신과 함께 삼사를 공격하고 역할을 축소하려 한 것이 사화의 본질이라는 것이죠. 현대로 따지자면 '대통령이 검찰 개혁을 하는 것'에 비유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무오사화 이후 삼사가 위축되고 왕권이 강화된 뒤 연산군의 정치는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왕권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고 나니 왕이 온갖 정치적 전횡, 사치와 향락, 무절제한 연회와 사냥,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음란한 행위를 일삼게 됐고 국정은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조선 왕조에서 별다른 제약 없이 일탈한 임금은 사실상 연산군 한 명뿐입니다.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갑자사화 2년 뒤인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쫓겨났고 두 달 만에 만 30세 나이로 죽었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