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400년 전 '인공섬' 만든 도시… 여기로 서양 문물 들어왔죠
입력 : 2025.09.24 03:30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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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가사키에 세워진 해군 전습소(가운데 건물들)와 인공섬 데지마(상단 부채꼴 섬). 일본은 데지마를 유일한 교역 창구로 삼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죠. /위키피디아
하지만 나가사키는 음식만으로 유명한 도시가 아니죠. 제2차 세계대전 때 나가사키엔 원자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최근 나루히토 천황 가족이 나가사키를 찾았습니다. 이번 방문은 종전 80주년을 맞아 진행됐는데요. 천황 가족은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원폭 희생자들을 기렸습니다.
나가사키는 일찍부터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교역의 창구였고, 메이지 시대에는 근대 공업 도시로 성장해 일본의 근대화에서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 노동을 해야 했던 하시마섬(군함도)도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죠. 오늘은 이 나가사키에 얽힌 일본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과 함께 세워진 도시
나가사키는 일본을 이루는 네 개의 큰 섬(규슈·시코쿠·혼슈·홋카이도) 가운데 규슈섬 서쪽 끝에 있는 도시예요.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답니다.
처음 포르투갈인들은 규슈 북부 지역에 들어와 기독교를 전하고 무역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조총 역시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일본에 처음 들어왔어요. 하지만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주민들과 충돌이 이어졌죠.
이때 등장한 인물이 오늘날 나가사키 인근 지역을 다스리던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입니다. 그는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였는데, 포르투갈과 무역을 해 이익을 얻기 위해 1571년 항구 도시 나가사키를 건설합니다. 나가사키는 파도를 피하기 좋은 만(灣)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수심이 깊어 큰 배도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본 서쪽 끝에 있어 동중국해로 곧바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무역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항구였죠.
이후 스미타다는 나가사키에 기독교인 거주지도 만들었어요. 이곳에 교회와 같은 서양식 건물이 지어졌고, 규모는 작지만 서양식 학교와 병원도 생겼습니다. 전국 시대 말기에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가장 기독교도가 많은 땅이 되었답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
하지만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도가 늘어나는 것을 경계했어요. 기독교가 외국 세력이 개입할 빌미가 되고, 일본 백성을 분열시킬까 두려워한 거죠. 히데요시는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나가사키를 직할령으로 만들고 지방 관리를 파견해 교회도 파괴했죠.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억압하는 정책은 계속하면서도, 무역으로 얻는 이익은 포기하지 못해 포르투갈 상인과의 교역은 유지했습니다. 덕분에 나가사키는 무역항으로 성장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지요.
이 강경책은 에도 막부로 이어졌습니다. 막부는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예수나 마리아 그림이 그려진 동판을 밟게 하는 '후미에'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면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막부에 나가사키는 말 그대로 '필요악' 같은 존재였어요. 나가사키는 은(銀), 비단, 향신료, 서양의 과학기술과 의약품 등이 들어오는 창구라 일본 경제에 꼭 필요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가 확산할 수 있는 근거지로 여겨졌죠. 그래서 막부는 무역은 허용하되, 기독교 확산은 막는다는 절충책으로 1636년 나가사키 앞바다에 인공섬 데지마를 건설하고 이곳에서만 외부 세계와의 교역을 이어갔습니다. 서양 국가 중에서는 기독교 포교에 소극적이라고 판단됐던 네덜란드 상인들만이 이곳을 드나들 수 있었죠.
막부가 데지마를 유일한 교역 창구로 삼으면서, 나가사키는 자연스럽게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고 불렀는데, 서양 학문이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이를 난학(蘭学)이라고 했답니다.
일본 학자들은 네덜란드 의학서를 번역해 '해체신서' 같은 책을 펴냈고, 서양의 의학 지식이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또 천문학, 지리학, 물리학 같은 근대 학문도 함께 들어왔지요. 이렇게 쌓인 지식은 훗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빠르게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 미쓰비시 기업을 세운 이와사키 야타로, 막부 타도 운동에 앞장선 사카모토 료마도 모두 나가사키를 활발히 드나들었죠.
군수 공업 도시의 그림자
19세기 중반, 일본은 미국과 맺은 조약을 계기로 쇄국을 끝내고 문호를 열었습니다. 그 결과 나가사키 외에도 다른 항구들이 개항하게 되었고, 교역의 중심지는 점차 요코하마와 고베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나가사키는 무역항에서 점차 군사와 산업 거점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죠.
막부 말기엔 나가사키에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해군 전습소'와 함선 수리 공장인 나가사키 용철소가 세워졌는데요. 이후 나가사키 용철소는 미쓰비시가 운영하는 민영 조선소가 됐고, 20세기엔 이곳에서 거대 전함 '무사시'를 비롯해 수많은 군함이 만들어지며 군수 공업의 중심지가 됐죠.
그러나 그 발전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많은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되어 차별과 억압을 견디며 일해야 했어요.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는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시민 약 24만명 중 3분의 1 정도가 목숨을 잃었고,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조선인도 1만명 이상 희생됐죠. 지금 나가사키엔 원폭 자료관과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평화공원 인근엔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도 세워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