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배우도, 관객도… 마스크를 쓰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되죠
입력 : 2025.09.22 03:30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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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르 마스크’의 한 장면. 전쟁에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프레데릭(왼쪽)과 다리가 불편하지만 조각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레오니(오른쪽)가 대화를 하는 장면. 두 사람은 초상 가면을 함께 만들면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요. /이모셔널씨어터
고대부터 마스크는 주술, 의례, 전쟁, 축제, 오락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됐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연극 배우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캐릭터의 감정이나 특징을 표현했지요. 당시 군인들은 전쟁 중에 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했는데, 적군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신비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마스크가 질병 예방을 위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부터예요.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에 유럽 의사들은 새 부리 모양의 가면을 썼어요. 전염병이 악취를 타고 옮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리 모양 마스크 안에 허브나 향료를 넣어 공기를 정화하려는 목적이었지요. 현재 우리가 쓰는 마스크의 형태는 18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발명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광부들이 호흡기 질환을 앓는 것을 막기 위해 동물의 장기를 이용해 마스크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마스크는 인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발전해 왔답니다.
최근 마스크를 소재로 하는 두 작품이 공연되고 있는데요. 오늘은 뮤지컬 '르 마스크'(11월 9일까지·서울 et theatre 1)와 연극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10월 30일까지·서울 매키탄호텔)를 소개하겠습니다.
전쟁에서 다친 군인들에게 자신감 줬죠
'르 마스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얼굴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군인들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 생긴 '초상 가면 스튜디오(Studio for Portrait Masks)'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상처가 생긴 병사들은 외모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기 어려워했어요. 이곳에선 그들을 위해 실제 얼굴처럼 생긴 '초상 가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참전 병사들은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지요. 전쟁으로 신체뿐 아니라 내면까지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뮤지컬에서 초상 가면 스튜디오를 설립한 '마담 래드'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어요. 바로 미국의 조각가 애나 콜먼 래드입니다. 애나는 뛰어난 조각가이자 작가, 극작가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과 예술적 역량을 쌓았죠.
그러던 1918년, 그녀는 영국 조각가 프랜시스 더원트 우드가 얼굴을 다친 병사들을 위해 가면을 만들어 준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애나는 곧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 스튜디오를 열게 되지요. 그녀는 조각가로서의 재능을 살려 상처 입은 병사들의 얼굴에 꼭 맞는 초상 가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가면은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병사들이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얼굴'이 된 것이죠.
초상 가면은 병사가 다치기 전 사진을 참고해 만들었습니다. 얇은 금속판을 얼굴 모양대로 본뜨고, 피부와 비슷한 색을 칠했습니다. 여기에 눈썹, 속눈썹, 수염까지 붙여 실제 얼굴과 거의 똑같이 보이도록 했지요. 애나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답니다.
마스크 쓴 관객, 직접 공연 속으로 들어가요
'슬립 노 모어'는 우리가 흔히 아는 연극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입니다. 보통은 관객이 객석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지만, 이 공연에서는 관객이 직접 공연 속으로 들어가지요.
2011년 뉴욕에서 처음 공연된 이 작품은 '매키트릭 호텔'이라는 6층짜리 건물에서 진행됩니다. 건물에는 100개 넘는 방이 있는데, 관객은 자유롭게 방을 오가며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거나 마음대로 공간을 탐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극 장르를 '이머시브 시어터(관객 참여형 연극)'라고 하지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레베카'를 바탕으로 하지만, 누구도 똑같은 공연을 볼 수는 없습니다. 관객마다 따라간 배우, 들어간 방, 본 장면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지요. 공연은 약 3시간 동안 이어지는데, 1시간 분량의 공연이 세 번 반복됩니다.
'슬립 노 모어'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모든 관객이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가린 관객들은 다른 관객이나 배우를 의식하지 않고, 오직 경험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공연에서 쓰는 가면은 이탈리아 전통 가면극에서 유래한 '바우타(bauta)'라는 흰색 가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거예요.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답니다.
뉴욕 매키트릭 호텔에서 시작된 '슬립 노 모어'는 현재 세계에서 단 두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데요. 바로 상하이와 서울입니다. 충무로에 있는 옛 대한극장 건물이 '매키탄 호텔'로 변신해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공간과 이야기를 탐험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면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