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영웅? 폭군?… 시대 따라 위인의 평가도 달라지죠

입력 : 2025.09.17 03:30

역사적 인물의 이면

최근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연합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대형 초상화가 미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도서관에 다시 내걸렸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리 장군의 초상화는 조 바이든 정부 시절 '인종차별 논란에 있는 인물을 기념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철거됐는데, 3년 만에 다시 걸린 겁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초상화. 인종차별 논란으로 2022년 미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됐다가, 최근 다시 걸렸다고 해요.
/스미스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초상화. 인종차별 논란으로 2022년 미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됐다가, 최근 다시 걸렸다고 해요. /스미스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
역사 속 인물은 늘 같은 모습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영웅처럼 칭송받지만, 다른 시대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해요. 또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평가를 하기도 하죠. 오늘 알아볼 알렉산드로스 대왕, 진시황, 에이브러햄 링컨은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제국의 건설자인가, 파괴의 정복자인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기원전 382~336)는 그리스를 정복한 후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다 암살당했어요.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56~323)는 스무 살에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계획을 이어받았지요. 그는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와 인더스강 유역까지 뻗어 나가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약 300년 동안 이어진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됐어요.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에 그리스 문화를 퍼뜨리면서도 다른 문화와의 융합을 시도했어요. 특히 정복지 주민들과 집단 결혼을 주관하면서 제국의 화합을 이끌었지요.

로마 시대 제작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자이크화. 알렉산드로 대왕은 정복 지역 주민들에게 포용 정책을 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지만, 수많은 전쟁을 일으킨 잔혹한 지배자라는 평가도 받지요.
로마 시대 제작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자이크화. 알렉산드로 대왕은 정복 지역 주민들에게 포용 정책을 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지만, 수많은 전쟁을 일으킨 잔혹한 지배자라는 평가도 받지요.
하지만 그를 보는 시선은 엇갈립니다.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숱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고, 그의 문화 정책도 사실은 그리스 문화를 우위에 두는 성격이 강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마저도 농촌 지역에서는 잘 이뤄지지 않았고요. 또 대부분의 주요 관직을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이 가져갔기에 정복지 사람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죠. 결국 그의 제국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곧바로 분열하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를 두고 누군가는 '동서를 잇는 위대한 정복자'라 하지만, 최근엔 부정적인 측면을 조명하는 연구도 많아지고 있어요.

폭군 진시황? 통일의 상징이기도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어요. 그는 화폐와 도량형(길이·부피·무게 등의 단위)을 통일했고, 문자를 정리해 오늘날 한자의 뿌리가 되는 소전체를 만들었지요. 또 북방 민족을 막기 위해 성벽을 연결해 만리장성의 기초를 쌓고, 전국 곳곳에 뻗은 도로망을 건설했습니다. 군현제를 실시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세운 것도 그의 업적이에요.

하지만 진시황은 폭군으로도 기억되고 있지요.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에는 그가 유학 경전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처벌했다는 '분서갱유'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 거대한 궁궐과 무덤을 건설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받았어요. 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잔혹한 군주로 불리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요.

청나라 시대에 진시황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에요. 진시황은 ‘분서갱유’ 등 사건을 저지른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진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청나라 시대에 진시황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에요. 진시황은 ‘분서갱유’ 등 사건을 저지른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진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진시황이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병사들에게 전공을 세우면 보상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과 평가도 있어요. 매일 엄청난 분량의 문서를 직접 검토할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고도 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인 마오쩌둥 역시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죠.

다만 진시황이 이후 동양 군주들의 모델이 됐다는 건 분명합니다. '황제'라는 칭호, 군현제와 중앙집권 제도, 사상의 통일은 후대 왕조들이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진시황이 없었다면 중국 대륙이 지금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폭군'이자 동시에 '통일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도 서로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에요.

민주주의의 상징 링컨, 정치의 한계도 보여줘

에이브러햄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게티즈버그 연설로 잘 알려진 정치인이지요. 이 연설은 민주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말로 지금까지 인용됩니다. 그래서 링컨은 자유와 평등의 상징으로 존경받지요.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에 있는 링컨 조각상. 그는 노예제 폐지를 이 끌었어요. 하지만 노예제와 인종에 대한 입장이 시기별로 달라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에 있는 링컨 조각상. 그는 노예제 폐지를 이 끌었어요. 하지만 노예제와 인종에 대한 입장이 시기별로 달라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링컨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가 처음부터 완전한 노예 해방론자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1858년 링컨은 선거운동 기간에 열린 토론에서 "흑인과 백인이 사회적·정치적으로 평등하게 살 수는 없다"는 취지로 말했죠. 흑인과 백인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도 했어요. 오늘날 기준으로는 분명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흑인들의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창기에 링컨이 가졌던 시각은 제한된 범위의 평등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때문에 일부에선 "링컨도 사실 인종차별주의자였다"라는 비판도 나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링컨의 태도를 시기별로 나눠 살펴야 한다고도 말하죠.

현실 정치에서도 링컨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보다도 북부와 남부로 갈라지지 않도록 미국 연방을 유지하는 거였습니다. 노예제 폐지 문제는 그다음이었죠. 링컨은 노예제를 확대하는 데 대해선 단호히 반대했지만, 기존 남부 주에서 즉각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었어요. 그는 1861년 대통령이 된 뒤에 "나는 기존 노예제 주에 간섭할 권한도 의향도 없다"고 했습니다. 또 "(남북)전쟁의 목적은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를 지키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죠.

그럼에도 링컨이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맞습니다. 남북전쟁 중인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헌법을 바꿔서 노예제를 완전히 없애려고 노력했어요. 그의 사망 직후 이뤄진 미국 내 노예제 폐지를 놓고 "링컨의 정치적 노력과 리더십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장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역사적 인물을 단순히 '영웅'이나 '악인'으로만 구분하기보다, 복합적인 얼굴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세정 옥길새길중학교 역사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