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라이벌에게 고개 숙이며… 60년 고난 견뎌 日 권좌 잡아

입력 : 2025.09.03 03:30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심을 존중한다"며 "정치에 있어 배울 점이 많다"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됐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현 도쿄)막부를 연 사람으로, 숱한 위기와 치욕을 참고 견디며 일본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인물이에요. 지금도 일본에서 '좋아하는 역사 인물'을 조사할 때마다 상위권에 꼽힌답니다.

그는 '참을성의 정치인'으로도 불리는데, 그의 인내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오래된 말이 있어요. 일본 전국(戰國)시대를 대표하는 삼인방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인데요. '울지 않는 새를 울리는 법'이 있다면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죽인다', 히데요시는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든다',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죠.

그는 어떤 고난 끝에 천하를 차지했던 것일까요? 오늘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 에도막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상징적 그림이에요. 좌우측 상단에 그려진 문양이 도쿠가와 가문의 상징(문장)입니다.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 에도막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상징적 그림이에요. 좌우측 상단에 그려진 문양이 도쿠가와 가문의 상징(문장)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인질

과거 일본은 왕(천황)이 있었지만, 실제 정치는 무사(사무라이)들이 이끌어 갔어요. 이런 무사 정권을 '막부'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가마쿠라막부(1192~1333)가 세워졌고, 이어서 무로마치막부(1336~

1573)가 있었죠. 그런데 무로마치막부 말기, 전국의 다이묘(영지를 소유한 무사)들이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어요.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일본 미카와(지금의 아이치현) 지역의 오카자키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하지만 그의 가문은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는 강력한 이마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이 자리 잡고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집안 중 한 곳과 동맹을 맺어야 했죠.

어머니 쪽은 오다 가문과 가까웠지만, 아버지 히로타다는 오다 가문과 맞서는 이마가와 가문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이마가와 가문에 충성을 보이기 위해 어머니와 이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때 이에야스는 겨우 두 살이었어요.

이처럼 이에야스의 어린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6세부터 오다와 이마가와 가문을 옮겨 가며 10년 이상 인질 생활을 한 것이죠. 1560년 이마가와 가문이 오다 가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전국시대 통일의 길을 연 오다 노부나가(왼쪽)와 그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 일본에선 두 인물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묶어 '전국 3영걸'이라 부르곤 합니다.
전국시대 통일의 길을 연 오다 노부나가(왼쪽)와 그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 일본에선 두 인물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묶어 '전국 3영걸'이라 부르곤 합니다.
결백 증명 위해 아내·아들 죽이기도

고향으로 돌아온 이에야스는 힘을 키우기 위해 오다 가문의 수장이자 전국 통일의기틀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습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문에 큰 승리를 거두며 전국시대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이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연합해 활약했고 나가시노 전투 이후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큰 시련을 겪습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혼인 동맹을 맺었어요. 그런데 그 며느리가 "이에야스의 가족들이 다른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고 자신의 가문에 밀고한 것이었죠. 노부나가는 고집과 자존심이 세고 항상 주변을 의심하는 인물이었어요. 이를 알고 있었던 이에야스는 자신의 결백을 보이기 위해 아내와 아들을 죽이는 선택을 내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생지인 아이치현 오카자키 성.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에 주요 시설이 철거되었다가, 20세기 중반에 복원됐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생지인 아이치현 오카자키 성.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에 주요 시설이 철거되었다가, 20세기 중반에 복원됐습니다.
히데요시와 '불편한 동맹' 이어져

하지만 곧 큰 시련이 다시 닥쳤습니다. 일본을 거의 통일할 무렵, 노부나가가 부하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은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우리에게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죠.

이에야스는 처음엔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쓰를 도와 히데요시에게 맞섰지만 패배했습니다. 결국 그는 히데요시와 화해하고, 히데요시에게 복종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불편한 관계는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년간 이어졌습니다.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다이묘였던 이에야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도 두려워했지요. 그래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에도가 있는 일본 동부 간토(關東) 지방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당시 에도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작은 어촌이었지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과 이시다 미쓰나리 측의 수많은 가문이 깃발을 내걸고 맞붙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위키피디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과 이시다 미쓰나리 측의 수많은 가문이 깃발을 내걸고 맞붙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위키피디아
에도 정비하며 세력 키웠죠

간토로 간 이에야스는 에도를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곳이 내륙 각지로 통하는 위치에다 바다도 끼고 있어 큰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도로와 수도를 설치하며 도시로서의 기틀을 다졌지요. 중앙에서 밀려나 간토 지방으로 간 것은 결과적으로 이에야스에게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에야스는 황무지 개간, 영지의 치안 문제 등의 이유를 대며 참전하지 않았어요. 그 덕분에 다른 다이묘들이 전쟁에서 많은 병사와 돈을 잃는 동안, 그는 군대를 보존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의 다이묘들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무단파와, 일본에 남아 행정을 운영했던 문치파였어요. 이에야스는 무단파 다이묘들과 동맹을 맺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문치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히데요시의 충복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와 대립하게 됩니다. 마침내 1600년,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에게 승리하며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황으로부터 쇼군(막부 최고 권력자)으로 임명되며 1603년 본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열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뒤엔 반대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며 일본은 도쿠가와 가문이 이끄는 에도막부 시대로 들어서게 됐지요.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