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조선 사람들이 비석 세운 이유… 조상 덕 알리는 것이 자손의 도리였대요

입력 : 2025.09.02 03:30

묘비

얼마 전 중국에서 발해의 9대 왕 간왕의 왕후인 순목황후의 묘지와 관련된 내용이 공개됐다고 해요. 중국이 최근 발해 왕릉 발굴 보고서를 편찬하면서 알려진 것이죠. 역사학자들은 이를 통해 발해 왕실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이처럼 과거엔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이름, 행적 등을 기록한 글)를 함께 묻기도 했어요. 근처엔 묘비(비석)를 세우는 전통이 있었죠. 오늘은 그중에서도 묘비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라 태종무열왕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은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요. 현재 비석의 몸통은 없어진 상태예요.
/국가유산청
신라 태종무열왕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은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요. 현재 비석의 몸통은 없어진 상태예요. /국가유산청
묘비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 묘비가 본격적으로 발달했는데, 특히 기원후 2세기 후한의 환제 시기에 가장 활발했다고 해요. 이후 삼국시대에는 위나라의 조조가 검소한 장례를 권하는 법령을 만들어 묘비를 무덤 바깥에 세우지 못하게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당나라 때부터 다시 무덤 근처에 묘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묘비에 사용되는 장식물들도 생겨났죠. 신분이 높은 경우 묘비 아래에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귀부)과 용 모양의 머릿돌(이수)을 사용할 수 있었어요. 이러한 양식은 한반도로도 전해졌는데, 신라의 태종무열왕릉비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죠.

서양에서도 묘비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죽은 사람의 석상과 함께 묘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퍼진 중세 이후, 유럽에서는 묘비 문화가 크게 발전했어요. 사람들은 성당 근처 땅을 공동묘지로 사용했는데, 왕이나 영주, 업적이 큰 사람은 성당 바닥에 묻히기도 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이 묻힌 곳에 묘비나 비문이 새겨진 석판을 세워 "여기에 누가 묻혀 있다"는 것을 알렸던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때 만들어진 묘비가 왕릉의 비석이나 고승(높은 지위의 스님)의 탑비 같은 것이 남아 있는데, 이런 묘비에는 그 사람의 업적이 기록돼 있어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는 묘비를 세우는 문화가 줄어들었어요. 그러다가 고려 말~조선 초 성리학이 퍼지면서, 조상의 덕을 밖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 자손의 도리라는 생각이 힘을 얻어 다시 묘비가 세워지기 시작했지요.

묘비는 주로 조선 시대에 많이 만들어졌어요. 조선 초기에는 연꽃이나 당초문(식물의 형태를 도안화한 장식 무늬) 등으로 장식된 묘비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불교적 색채가 강하고, 글자가 빨리 닳는 단점도 있어 성리학 질서가 강화되는 16세기 무렵부터는 점차 사라지게 됐어요. 대신 묘비 윗부분을 기와지붕 같은 형태로 만들어 비문이 오래 보존되도록 했고, 비석 재료도 대리석에서 점차 오석(검은 돌)으로 바뀌었습니다.
김현철 서울 영동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