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역사의 소용돌이 속… 운명에 맞서는 가족의 비극 다뤘죠

입력 : 2025.09.01 03:30

퉁소소리·조씨고아

고전엔 시대를 관통하며 공감을 얻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두 편의 연극도 한국과 중국의 고전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옛날 한국과 중국은 전쟁과 재난이 많아 백성의 삶이 고달팠습니다. 두 작품 모두 이런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놓인 한 인간의 삶과 운명을 들여다보는 공통점이 있어요.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가족의 이산(헤어져 흩어짐)과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 속에서 좌절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대신,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죠.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두 편의 연극은 매년 공연될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조선의 문인 조위한이 1621년 완성한 소설 '최척전'을 바탕으로 한 '퉁소소리'(9월 5~28일·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그리고 '동양의 햄릿'이라 불리는 중국 원나라 시대 희곡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한 동명 연극 '조씨고아'(11월 21~30일·명동예술극장)를 만나 볼까요.

연극 ‘퉁소소리’의 공연 장면. 퉁소를 부는 최척의 모습이에요. 극에서 퉁소 소리는 최척과 옥영 부부가 겪는 이별과 고난, 그리움을 나타내지요.
연극 ‘퉁소소리’의 공연 장면. 퉁소를 부는 최척의 모습이에요. 극에서 퉁소 소리는 최척과 옥영 부부가 겪는 이별과 고난, 그리움을 나타내지요.
최척의 가족은 천신만고 끝에 재회합니다. 최척의 아들 몽선이 홍도를 아내로 맞아 결혼식을 올리며 가족 모두가 행복을 되찾는 장면이에요.
/서울시극단
최척의 가족은 천신만고 끝에 재회합니다. 최척의 아들 몽선이 홍도를 아내로 맞아 결혼식을 올리며 가족 모두가 행복을 되찾는 장면이에요. /서울시극단
두 번의 전쟁에 휩쓸린 가족 이야기

연극 '퉁소소리'의 원작 '최척전'은 고전문학의 한 갈래인 전기소설로 분류할 수 있어요. 전기소설은 귀신과 인연을 맺거나, 용궁에 가 보는 것처럼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말합니다. 전기소설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단편소설을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되지요.

전기소설은 한국에도 전해져 독자적인 소설 양식으로 발전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금오신화'입니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거부한 김시습이 금오산에 숨어 지내며 지은 작품이지요.

'퉁소소리'는 '극중극' 형식으로 진행돼요. 극중극은 연극 속에 또 다른 연극이 들어 있는 형식입니다. 막이 오르면 '최척전'의 주인공 최척이 무대에 올라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최척전'을 쓴 조위한은 소설 서문에서 "주인공 최척에게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직접 듣고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연극도 이 설정을 그대로 따라, 흰 수염이 난 노년의 선비 최척이 관객에게 직접 자신의 인생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관객들은 그의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 속으로 금세 빠져들게 되지요.

이야기의 배경은 조선 중기, 일본의 침략으로 벌어진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의 혼란기입니다. 금슬 좋은 부부였던 최척과 옥영은 전쟁 때문에 뜻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돼요. 전쟁의 불길 속에서 최척은 의병에 참여하게 되고, 옥영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지요.

두 사람은 이후 각자 타국을 떠도는 힘든 운명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꿋꿋이 어려운 처지를 견뎌내지요. 오랜 세월 서로를 찾아 헤매던 둘은 운명의 장난처럼 먼 이국 땅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기적처럼 재회하게 돼요. 결국 부부는 조선으로 돌아오고, 다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지요. 극중에서 옥영은 "살아 있으면 좋은 날이 올 거야!"라고 외칩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힘은 이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희망 덕분이었지요.

연극 ‘조씨고아’의 한 장면. 조씨 가문에 은혜를 입은 떠돌이 의사 정영(왼쪽)이 자신의 아들과 조씨고아를 바꿔치기하는 모습입니다.
연극 ‘조씨고아’의 한 장면. 조씨 가문에 은혜를 입은 떠돌이 의사 정영(왼쪽)이 자신의 아들과 조씨고아를 바꿔치기하는 모습입니다.
연극 ‘조씨고아’에서 정영(오른쪽)은 조씨고아(왼쪽)가 장성한 뒤 조씨 가문의 멸족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지요.
/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에서 정영(오른쪽)은 조씨고아(왼쪽)가 장성한 뒤 조씨 가문의 멸족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지요. /국립극단
'동양의 햄릿'으로 불리며 작품성 인정받아

연극 '조씨고아'의 원작은 13세기 원나라 작가 기군상이 쓴 동명의 희곡이에요. 이 작품은 '잡극'이라는 장르에 속하는데, 잡극은 원나라 시대 크게 유행한 연극 형식으로 노래와 연기, 춤, 곡예 같은 볼거리가 모두 합쳐진 종합 예술이었어요.

'조씨고아'는 실제 역사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어요. 무대는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인데,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에도 관련 기록이 전해집니다. 진나라 장수 도안고의 계략으로 인해 조씨 가문은 멸족당하게 됩니다. 조씨 집안에서 살아남은 것은 한 명의 어린아이뿐이었지요. 도안고는 조씨 가문의 아이를 찾아 없애려 합니다. 이때 조씨 가문에 깊은 은혜를 입었던 떠돌이 의원 '정영'은 자신의 아기를 조씨 아기인 것처럼 바꿔치기해서 내주지요. 친아이를 내주면서까지 조씨 집안 아기를 거두어 기르면서 조씨 가문에 은혜를 갚은 것이지요. 이렇게 살아남은 아이가 바로 '조씨고아'예요. 20년 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조씨고아는 도안고에게 복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조씨고아'가 쓰인 때는 원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치하던 시기였어요. 원은 몽골족이 세운 나라로, 중국의 한족 왕조였던 송나라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배경을 생각하면, 작품 속 조씨 가문을 송나라 왕족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과 작품의 조씨 가문이 겹쳐 보이지요.

겉으로 보면 '조씨고아'는 자기 아들을 희생한 정영의 충절과, 도안고에게 복수를 준비하는 조씨고아의 개인적인 비극을 다룬 이야기예요.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보면, 몽골족에게 지배받던 한족 백성의 슬픔과 억울함을 조씨 가문의 몰락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조씨고아'는 중국 희곡 가운데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된 작품이기도 해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이 작품을 바탕으로 '중국의 고아'라는 희곡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당시 유럽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동양의 햄릿'이라고 부르며 크게 감탄했지요. '조씨고아'가 동양과 서양 문학이 서로 만나는 다리 역할을 한 셈입니다.

연극 '조씨고아' 역시 2015년 초연 이후 주요 연극상을 받고 올해까지 공연되고 있어요. 2016년에는 중국에 초청되어 국가화극원 대극장 무대에 올려졌는데요. 한국과 중국의 연극 교류에도 큰 역할을 한 작품이지요.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