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주권 뺏긴 '허수아비' 임금… 6·10 만세운동 기폭제 됐죠

입력 : 2025.08.28 03:30

마지막 황제, 순종

❶창덕궁 희정당 벽에 걸렸던 '총석정절경도'예요. 해강 김규진(1868~1933)의 작품으로, 금강산 총석정 전경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렸습니다. ❷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사진. 육군 대장복 차림으로, 1909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❸순종이 탔던 어차. 미국 제너럴모터스(GM)사가 제작했습니다. ❹1909년 촬영된 사진으로, 순종이 부산을 순행하는 모습입니다. 당시 부산 백성들은 부산에 방문한 순종이 일본으로 납치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어요.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한 결사대도 만들어졌죠. /국립고궁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❶창덕궁 희정당 벽에 걸렸던 '총석정절경도'예요. 해강 김규진(1868~1933)의 작품으로, 금강산 총석정 전경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렸습니다. ❷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사진. 육군 대장복 차림으로, 1909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❸순종이 탔던 어차. 미국 제너럴모터스(GM)사가 제작했습니다. ❹1909년 촬영된 사진으로, 순종이 부산을 순행하는 모습입니다. 당시 부산 백성들은 부산에 방문한 순종이 일본으로 납치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어요.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한 결사대도 만들어졌죠. /국립고궁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광화문 서쪽에 있는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라는 특별전(10월 12일까지)을 열고 있어요. 여기서 '근사'란 '경건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 바친다'는 뜻입니다. 김은호·노수현·이상범 등 20세기 초의 국내 최고 화가들이 비단에 그려 창덕궁 여러 건물 실내에 붙였던 대형 벽화 6점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아놓았죠. 금강산과 총석정 같은 절경, 봉황과 백학을 그린 모습이 보는 관람객의 입을 벌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를 위한 그림이었을까요? 1926년 숨을 거두기까지 이곳에서 살던 사람, 바로 조선 왕조의 27대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입니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 세자·태자만 32년

왕세자란 임금의 아들 중에서도 임금 자리를 이을 것으로 정해진 사람입니다. 조선에선 왕세자(황태자 포함) 자리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정작 임금 노릇은 짧게 하거나 아예 임금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특징이 있죠. 왕세자 기간이 길었던 인물 5위는 인종(24년 7개월), 4위 사도세자(26년 1개월), 3위 문종(29년 4개월), 2위 경종(29년 11개월)이었습니다. 그럼 1위는? 바로 순종입니다. 왕세자와 왕태자·황태자 기간을 합친 기간이 32년 5개월에 달합니다.

아버지 고종과 어머니 명성황후 사이에서 순종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고종이 즉위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낳은 자녀 중에서 유일하게 어려서 죽지 않았고, 고종의 여러 자식 중 유일한 정실(본처)이 낳은 아들이었어요. 아버지 고종이 43년 동안 임금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세자로서 임금이 되기 위한 교육도 오래 받았지만, 순탄치 않았죠. 어려서 천연두에 걸리기도 했고 잔병도 많았다고 해요.

21세 때인 1895년 친모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을 겪은 데 이어, 대한제국의 수립으로 황태자가 된 다음 해인 1898년 큰 역경이 그에게 닥칩니다. 바로 '김홍륙 독차 사건'이죠. 러시아 통역관 출신으로 위세를 떨치던 김홍륙이란 사람이 임금에게 앙심을 품고, 고종과 황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탄 것이었습니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던 고종은 바로 뱉어냈지만, 이미 많이 마신 황태자는 피를 토하고 기절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치아가 많이 빠져 틀니를 해야 했고, 슬하에 자식을 보지 못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란 추측도 있어요. 심지어 '총명한 사람이었는데 이후 바보가 됐다'는 말까지 나왔죠.

허수아비 황제 노릇 3년 1개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제에 의해 아버지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 순종은 1907년 대한제국의 2대 황제가 됩니다. 즉위식이 열렸던 장소가 최근 복원된 덕수궁 돈덕전이에요. 하지만 이미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순종 즉위 직후 군대마저 강제 해산되는 처지가 됩니다. 웬만한 권한을 다 빼앗긴 '나라라고 볼 수 없는 나라'의 허울뿐인 황제가 됐던 것이죠. 그나마 겨우 3년 1개월 갔습니다. 게다가 주위에 있는 신하라고는 거의 다 '친일 매국 대신'뿐이었습니다. 순종은 밀사를 외국에 보내 호소하거나 의병 세력과 은밀히 연락했던 아버지 고종 수준의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황제 자리에 있을 때 순종이 한 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방을 순행(巡幸·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한 일이죠. 1909년 1월 7~13일 대구·부산·마산 등을, 1월 27일~2월 3일 평양·의주·개성 등을 궁정 열차를 타고 순행했습니다. 이것을 '남서순행'이라고 하는데, 반일 감정을 잠재우고 '문명 개화'를 업은 일본의 통치를 합리화하려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와는 반대로, 황제를 맞은 전국 각지 백성들 사이에서 애국심이 고취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일본의 강요가 있기는 했지만, 순종은 1909년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유원지로 바꿔 백성에게 처음으로 궁궐을 개방하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11월 1일 창경원 개원식엔 초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엿새 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죠. 순종은 정약용과 박지원처럼 재평가가 필요한 역사 인물에게 새로 시호를 내려 주기도 했으나, 너무 늦은 일이었습니다.



항일 활동 없었으나 죽음이 6·10 만세 기폭제 돼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멸망합니다. 이것은 순종이 일왕에게 합병을 청원하는 형식이었지만 순종의 조칙(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에는 끝내 그의 국새가 찍히지 않았어요. 이후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격하돼 창덕궁에서 살았습니다.

씁쓸한 얘기지만, 순종은 20세기 초 한반도에 밀려온 근대 문화를 가장 먼저 호화롭게 경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국립고궁박물관 1층에는 어차(御車)라는 이름의 진귀한 초창기 자동차가 전시돼 있는데, 순종 부부가 타고 다니던 황금 문양으로 장식된 7인승 대형 리무진입니다. 또 순종은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옥돌대(당구대)를 설치하고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당구를 즐겼다고 해요. 요즘 4구 기준으로 200점 실력이었다고도 하는데 당시로선 상당한 수준이었죠. 미식가였던 아버지 고종과는 달리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지만 일본인 요리사가 만들어 준 프랑스 요리만큼은 즐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어요. 이복동생 의친왕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했다 실패했지만 순종은 그런 것조차 하지 않았죠. 다만 1926년 4월 그가 죽은 뒤 '병합은 내 뜻이 아니었으니 조약을 파기해 광복하라'는 유언이 미국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에 실렸습니다. 그래도 임금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나라 잃은 백성들은 장례일에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이것이 6·10 만세운동입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