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서울 중심서 600년 역사 품어… 세 번이나 다시 지어졌죠

입력 : 2025.08.14 03:30

광화문

현재 광화문 모습이에요. 왕실 의례 때 사용했던 광화문 앞 월대가 2023년에 복원됐습니다. /국가유산청
현재 광화문 모습이에요. 왕실 의례 때 사용했던 광화문 앞 월대가 2023년에 복원됐습니다. /국가유산청
지난 11일 서울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의 석축에 매직펜으로 쓴 낙서가 발견돼 국가유산청이 제거 작업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낙서를 한 사람은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유산 중 하나인 경복궁에 1년 8개월 만에 또다시 낙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친숙한 건물인 광화문에 말이죠. 오늘은 광화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임금의 덕으로 바른 정치를 사방에 미친다'

우리는 광복의 기쁨을 말할 때 '광화문 앞에 태극기가 휘날렸다'는 표현을 잘 씁니다. 작가 심훈은 시 '그날이 오면'에서 광복이 된다면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 것이라고 노래했는데, '육조 앞 넓은 길'이란 지금의 광화문광장입니다. '광화문 한복판' '광화문네거리(정식 명칭은 세종대로사거리)'라는 말에서 보듯 광화문은 수도 서울의 가장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광화문과 광화문네거리가 광화문광장을 사이에 두고 약 600m 떨어져 있어 약간 혼동을 주기도 하지만요.

광화문이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 초기인 1398년(태조 7년)의 일이었습니다. 조선의 법궁(法宮)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이 지어진 것은 1395년이었는데요. 법궁은 왕이 거처하고 정사를 보던 궁궐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궁궐이에요. 이때 현재의 흥례문 자리에 있던 오문(午門)이 정문 역할을 했다가 나중에 궁성을 추가로 지으면서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서문인 영추문(迎秋門)과 함께 광화문이 건립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자 정전(왕이 조회를 하던 궁전)인 근정전으로 가려면 정문인 광화문과 흥례문, 근정문 세 문을 지나게 됐죠.

이 경복궁 정문에 '광화문'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1426년(세종 8년)이었습니다. 무슨 뜻이었을까요? '빛[光]으로 교화[化]해 나라와 백성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예요.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에 나오는 '광피사표(光被四表) 화급만방(化及萬方)', 즉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글귀에서 앞의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하네요. '빛'은 군주의 덕이고 '교화'란 바른 정치를 말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 이름을 세종대왕 때 지었다는 것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해요. 광화문을 지날 때마다 이 문에서 생겨난 빛이 사방을 환히 비추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일본인도 반대한 '광화문 철거'

조선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광화문은 석축 기단의 세 곳에 홍예문(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을 내 3문 형식을 갖춘 문입니다. 그런데 발굴 조사 결과 조선 전기에는 둥근 문이 아니라 사각형 형태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네요. 또 광화문 양쪽 옆에 물이 드나드는 수문이 있어서 5문으로도 보였다고 합니다. '황제국의 문은 5개, 제후국의 문은 3개'라는 '주례'의 규정을 절충했다는 해석도 있어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타면서 광화문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270여 년 동안 경복궁 일대는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어지게 됐어요. 광화문 현판의 글씨는 무관 임태영이 쓴 것이라고 '고종실록'에 기록됐습니다.

그런데 다시 지어진 지 50여 년 만에 광화문은 또 수난을 겪게 됩니다. 1916년 일제는 경복궁 앞뜰을 훼손해 조선총독부의 새 청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 건물은 10년 뒤 완공됐는데, 이 과정에서 총독부 건물 앞에 있는 광화문도 철거 위기를 맞게 됐어요. 이에 대해 많은 조선인은 물론 일부 일본인도 '철거 반대'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저명한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였습니다. 그는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에도(도쿄의 옛 이름)의 궁성이 폐허가 되며 그 자리에 서양풍의 큰 총독부 건물을 짓게 된다고 상상해 보라"고 했습니다. 또 "이곳으로부터 조선이 존재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여러 많은 건축이 전면 좌우에 이어져 있으며, 광대한 도성의 대로를 직선으로 해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서로 호응한다"며 광화문의 건축적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총독부에선 기분이 나빴는지 "그 자는 혹시 조선인인데 일본인 행세를 하는 게 아니냐"며 뒷조사를 했는데 일본인이 맞았다고 합니다.

이전, 폭격, 그 뒤로 두 번 다시 짓다

광화문은 가까스로 철거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일제는 총독부 청사를 가리는 것만큼은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건춘문 북쪽으로 광화문을 해체해 이전했죠. 해방 뒤 옛 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 중앙청으로 바뀌었고, 1948년 8월 15일 이곳에서 정부 수립 선포식을 했죠. 옮겨진 광화문은 안타깝게도 1950년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불타 버렸고 아래쪽 석축만 남았습니다.

1968년 광화문은 중앙청 앞에 다시 복원됐습니다. 남아 있는 석축을 활용했고, 나무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건물을 지었습니다. 산업화가 이뤄지던 당시엔 현대적인 신공법으로 복원했다는 인식 때문에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광화문'이라고 쓴 한글 현판이 걸렸죠. 이 '콘크리트 광화문'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993년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하나로 1996년까지 옛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철거했습니다. 이제 광화문도 옛날 모습으로 다시 짓는 일이 현안으로 떠올랐죠. 콘크리트로 지은 광화문은 2006년 철거됐고, 옛 방식대로 소나무와 화강암을 부재로 삼아 짓고 한자 현판을 단 광화문이 2010년에 복원됐습니다. 2023년에는 광화문 앞 월대(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만들었던 넓은 대)가 복원됐는데, 고종 시기 중건 때는 월대가 있었으나 조선 전기에 있었다는 근거는 없어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