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아리랑은 원래 영화음악
입력 : 2025.07.31 03:30
나운규와 영화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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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년 무성영화‘아리랑’의 원본 스틸 사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로부터 고문을 받고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 영진(나운규)이 여동생 영희(신일선)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장면이에요. /영화 아리랑 개봉 100년 기념사업회
영화 주제곡이 전국 민요가 되다
이런 질문을 하나 해 볼게요. "민요가 영화음악이 된 경우가 있을까요?" 네, 종종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졸업'(1967)에선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노래 '스카버러 페어'가 나오는데, 옛 영국 민요를 편곡한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영화음악이 민요가 된 경우는 있을까요?" 에이~ 그게 말이 되느냐고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바로 192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요.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시작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로 끝나는,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노래였습니다. 알고 보니 나운규가 작사하고 단성사 음악대(밴드)가 작곡한 노래였어요. 무성영화인데 주제곡을 어떻게 관객이 들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서울 단성사 같은 극장에선 변사와 함께 음악대가 늘 무대에 올랐고, '아리랑' 상영 때는 인기 가수 유경이가 나와 반주에 맞춰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무성영화의 상영은 일종의 공연과도 같았던 셈이죠.
영화가 그야말로 전국적인 히트를 쳤기 때문에 이 주제곡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민요가 됐고, '밀양 아리랑'이나 '진도 아리랑'처럼 지역 민요가 아닌 '전국 민요'로서 자리 잡은 겁니다.
청년 독립운동가, 영화판에 입성하다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대한제국 군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18년 만주의 명동중학에 입학했고 3·1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1920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가입해 독립 투쟁에 몸을 담았습니다. '청회선 터널 폭파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일제에 체포돼 1년 6개월 동안 옥살이도 했어요.
당시 국내에선 1919년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온갖 흑백 무성영화들이 제작되면서,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던 시기였죠. 1923년 출소 후 나운규는 이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1924년 영화사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할로 처음 영화에 출연합니다.
그는 1925년 '심청전'에서 심 봉사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 '농중조'에선 뛰어난 주연 연기로 관객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해요. 그다음 영화가 바로 나운규가 직접 메가폰을 잡고 주연을 맡은 대작 '아리랑'이었습니다.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소이다!"
"대담한 촬영술! 조선 영화 사상 신기록! 촬영 3개월간! 제작 비용 1만5천원 돌파!" 당시 조선일보에 실렸던 영화 '아리랑'의 광고 문구입니다. 주인공 김영진(나운규)은 서울에 유학 갔다가 3·1 운동에 참가해 일제의 고문을 받고 실성한 채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누이동생 영희(신일선)에게 나쁜 짓을 하려던 친일 지주의 앞잡이 오기호를 죽인 뒤 일본 순사(경찰)에게 붙잡혀 끌려갑니다. 이때 주인공은 정신이 돌아온 듯한 표정을 짓고, 변사는 애끊는 목소리로 이런 대사를 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 무대 위 가수가 노래를 부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여기서 관객들은 눈물바다를 넘어서서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미친 주인공은 일제에 저항하는 이 땅의 민중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 관객의 민족 의식을 각성시키는 항일 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서울 단성사를 비롯한 전국 극장은 '아리랑'을 보려는 관객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의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극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에게 위문용으로 이 영화를 보여줬는데, 관람 후 노동자들이 울면서 시위를 벌여 일제 당국이 당혹해했다고 합니다.
'아리랑'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서울에서만 아홉 번 재상영됐고, 제작된 지 12년이 흐른 1938년 조선일보가 조사한 한국 영화 선호도 결과에서 무성영화 부문 1위였습니다. '아리랑'은 2편(1929)과 유성영화인 3편(1936)까지 만들어졌습니다. 해방 후 2003년까지 이강천·유현목 등 나운규를 뛰어넘으려던 유명 감독들에 의해 다섯 번 이상 리메이크됐습니다.
한국 영화의 세계시장 진출을 내다보다
'아리랑' 이후 나운규는 '사랑을 찾아서'(1928)와 '벙어리 삼룡'(1929) 등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았고, 문예봉과 함께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1932)의 주연으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독을 맡은 영화 15편과 출연작 24편은 현재 필름 한 조각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운규는 깊고 긴 안목을 지닌 예술가였습니다. 1936년 11월 잡지 '삼천리'의 대담에서 사회자가 '조선 영화가 국제적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있을까' 묻자 나운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 각국 사람이 다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감성을 잘 붙잡아, 조선의 산하와 정조를 기조로 하고 만들어낸다면 세계시장 진출에 어렵지 않을 줄 알아요… 우리 속에서도 명배우가 나고, 명감독이 나고, 큰 문호가 나서 본질적으로 그네들을 이길 생각을 해야겠어요." 혹시 그는 몰래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기 이후의 세상을 미리 다녀간 것은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나운규는 당시만 해도 불치병에 가깝던 결핵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숨졌습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