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마지막 독립운동 작전… 美 정보기관과 합동 훈련도 했죠
입력 : 2025.07.24 03:30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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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범석(왼쪽에서 둘째) 장군과 미국 OSS 장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1945년 초에 촬영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美 OSS와 광복군의 합작 훈련
"밧줄을 타고 절벽 밑까지 내려가 페인트칠이 된 나뭇잎을 따온다든가, 밤에 낙하 연습을 한다든가, 식사 시에 매몰한 폭약을 바로 옆에서 폭발시킨다든가, 특수 은폐 및 엄폐법을 가르친다든가 하는 적지 침투 공작이었다. 이 교관들은 모두가 미 육군 특전단의 전술 사관들이었다."(장준하 '돌베개')
1945년 초, 한국인 광복군 청년들이 중국 시안(西安)에서 이렇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어요. 시안은 한(漢), 당(唐) 등과 같은 여러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죠.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맞섰던 중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습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창설된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일본과 싸우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 측에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전했다고 해요.
한반도 문제에 소극적이던 미국 정부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의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해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활용하고자 했어요. 이렇게 해서 1945년 초부터 광복군은 미국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함께 시안에서 요원을 훈련하는 임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OSS는 오늘날의 CIA(미 중앙정보국)의 전신이에요.
1945년 8월, 독수리 작전의 임박
당시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이란 이름으로 추진됐다고 해요. 특수 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첩보 거점을 만들게 한 뒤 유격 활동, 민중 봉기 등 적의 후방을 교란시킬 계획이었답니다. 연합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도와서 함께 일본군과 싸운다는 웅대한 계획까지 있었죠.
시안 광복군 제2지대에서 진행된 OSS 특수 훈련은 예비 훈련, 학과 교육, 야전 훈련 등으로 이뤄졌다고 해요. 단계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등 과정도 엄격했습니다. 당시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 이들과 함께 있었던 인물이 1920년 청산리 전투의 영웅 중 한 명인 이범석(1900~1972) 장군이었어요.
OSS 훈련을 받던 광복군 중에 장준하(1918~1975)와 김준엽(1920~2011)이라는 두 청년도 있었습니다. 장준하는 27세, 김준엽은 25세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전쟁 말기 학병(學兵)으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지만, 중국 전선에서 함께 탈출한 뒤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에 합류했다고 해요. 두 사람 역시 광복군의 일원으로 국내에 다시 진입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죠.
1945년 8월 초, 마침내 대원들의 훈련이 끝났습니다. 김구와 지청천·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비행기를 타고 충칭에서 시안으로 가 대원들을 사열하고 격려했습니다. 김구는 마침 시안에 와 있던 OSS 총책임자 윌리엄 도노번과 회담하고 공동 작전을 빨리 시행할 것을 합의했습니다.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군대를 이끌고 파리 탈환에 참여했듯, 임시정부도 광복군과 함께 한반도를 해방시킬 날이 다가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일본의 항복 발표… 작전이 무산됐다
그러나 8월 15일,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 발표를 한 겁니다. 임정 주석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회고했어요. "아! 일본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광복군 진공 작전을 통해 연합국의 일원이 되려 했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앞으로 진정한 독립까지 험난한 길을 걸으리라고 예견했던 겁니다.
8월 18일 시안에서 비행기를 탄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서울 여의도비행장(현 여의도공원)에 착륙해 국내 진입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방해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28시간 만인 19일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일본군은 착륙했던 미군과 광복군 일행을 포위한 뒤 "돌아갔다가 (종전) 조약이 체결되면 그때 다시 오라"고 압박했대요. 이로써 광복군의 진공 작전은 실행하지 못한 상태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김광재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임시정부가 전개한 국외 독립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합니다.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는 여기서 좀 묘한 장면이 묘사됩니다. 이범석과 장준하·김준엽 등의 광복군이 여의도에 착륙한 18일 밤, 광복군의 숙소에 일본군 대좌가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맥주를 권했다고 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술을 입에도 댄 적이 없던 장준하에게 김준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 형! 오늘만큼은 술을 마셔야 하오. 이건 왜놈들의 항복주요!" 취기가 오른 이범석이 배석한 일본군 중좌에게 "어디 너희 군가나 한번 불러 보라"고 했더니 이번엔 비장한 목소리로 일본 군가를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훗날의 복수를 위해 오늘의 굴욕을 과장하려는 일본인 특유의 심리가 발동된 것으로 보이네요.
두 광복군 청년, 장준하와 김준엽은 그 뒤 어떻게 됐을까요? 장준하는 정계와 언론계에서 활동했고 '사상계'를 창간했으며, '재야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반(反)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된 김준엽은 고려대 총장 시절 제5공화국 정권의 압력에 맞서 국민적 존경을 받았고, 1987년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그를 제6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임명하려 했으나 "나는 학자로 남겠다"며 끝까지 고사(固辭·굳게 사양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