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서른 넘도록 결혼 못 하면 나라에서 혼수도 대줬죠
입력 : 2025.07.17 03:30
조선의 인구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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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의 호구(호적상 집과 식구의 수)를 기록한 문서인 '호구총수'. 1789년(정조 13년) 편찬됐어요. 조선 조정은 3년마다 호구 조사를 했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과거 조선 시대에도 국가 차원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막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2023년 논문 '조선 시대 인구 정책에 관한 소고'를 쓴 김영재 단국대 초빙교수와 주운현 건양대 교수는 "호구(호적상 집과 식구의 수)와 인구 조사는 주기적으로 엄격하게 시행됐고 호구를 늘려잡는 행위는 금지됐다"고 설명합니다.
백성이 늘어나야 나라도 안정된다
"그래, 안주의 호구는 얼마나 되는가?"
1765년(영조 41년) 경희궁 안 왕의 집무 공간이었던 흥정당에서 영조 임금이 참찬관 홍준해에게 물었어요. 홍준해는 얼마 전까지 평안도 안주 목사를 지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호구가 전보다 점점 적어집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인구 감소 현상을 솔직하게 고한 것이었죠. 임금은 "최근 수령들이 함부로 호구를 늘려 잡아 공을 삼으려고 하는데, 그대는 홀로 사실대로 대답하니 충실하게 지방관 노릇을 했다는 것을 알겠다"며 말을 상으로 줬습니다.
마치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 같은 이 일화는 영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각 지방의 호구가 늘어나는 것이 지방관의 공으로 여겨졌고, 그런 공을 세우기 위해 편법으로 호구 수를 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사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은 단지 유교 국가의 상징적인 표현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 수가 충분해야 당시 산업의 기틀이었던 농업이 튼튼히 이뤄질 수 있고, 세금도 제대로 걷히며, 국방도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 때문에 당시에도 인구 감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실제 인구를 면밀히 파악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엄격한 호구 조사로 인구 감소 방지
호구와 인구 조사는 주기적으로 매우 엄격하게 시행됐다고 합니다. 조선의 공식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한 번씩 호적을 고쳐 작성해 호조(6조 중 호구에 관한 일을 맡던 관아)와 한성부(지금의 서울시), 해당 도(道)와 고을에 보관한다'고 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호구 조사를 할 때 본인의 이름과 나이, 본관,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외조부, 자식, 노비 등을 상세히 기록해야 하고, 본인 서명과 관인(관청의 도장)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죠.
조선왕조의 전체 인구는 건국 시점인 14세기 말 최대 750만 명, 말기인 19세기 말에 17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꾸준히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근(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림)과 전염병이 돌면 인구가 감소하는 현상도 일어났는데, 1693년(숙종 19년)부터 6년 동안 141만 명이 줄어들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은 통계에 잡히지 않아 관리들이 늘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경국대전엔 '남 15세, 여 14세 되면 결혼 허락'
그런데 인구가 증가하려면 아기가 많이 태어나야 하고, 그러려면 남녀가 결혼을 해야 하겠죠? '경국대전'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가 되면 결혼을 허락한다. 만약 두 집 부모 가운데서 한 사람이 병을 지니거나 나이가 만 50세가 되고 12세 이상 자녀가 있으면 관청에 신고해서 결혼을 허락한다.' 지금 보면 상당히 적극적인 조혼(早婚·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함)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늘리거나 속이다가 발각되면 그 집안에 벌을 준다'는 내용도 있죠.
태종과 중종 때는 사람들을 더욱 닦달하는 '혼인 독촉' 정책도 나타났습니다. 나이 30세가 지났는데도 아직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관에서 혼수를 마련해 주고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집이 가난해서 결혼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관할 관청에서 물자를 지급해 주기도 했어요. 지난해 우리나라의 초혼 평균 연령이 남성 33.8세, 여성 31.5세인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한편 '왜 지금 출산율이 낮은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는 선혜청이란 관청이 여기에 활용됐습니다. 선혜청은 광해군 때 대동법(여러 가지 공물을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 제도)이 처음 시행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청인데요. 이 선혜청이 한성(지금의 서울) 안에서 때를 놓쳐 혼인하지 못한 사람에게 혼수를 지급해 돕도록 했던 것입니다. 1773년 영조는 "40세가 넘도록 혼인하지 못한 사람들을 즉시 도와줘 혼례를 치르게 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
임신부엔 출산휴가와 형벌 유예도
'다둥이 부모'에 대한 지원도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쌍둥이를 출산하는 경우 곡식을 주는 경우가 여러 번 나타납니다. 세종대왕은 "관노비가 출산을 할 경우 1개월 전부터 복무를 면제케 해 주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출산휴가라고 보기도 합니다. 광해군 때는 한 관리가 임금에게 '임신부의 경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출산을 한 뒤에 형벌을 받게끔 법전에 명시돼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 인구 정책의 특징은 호구와 인구의 철저한 조사와 유지, 혼인 독촉과 출산 장려, 자연재해 등 변수에 대한 대응, 육아 지원과 형법상 배려 등으로 꼽을 수 있다고 김영재·주운현 교수는 말합니다.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생업에 종사하기 좋은 곳에 사람이 모여 인구 밀도가 높아지는 현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펼칠 인구 정책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