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청나라 여행한 조선 실학자의 깨달음 "도덕보다 풍요로운 삶이 먼저"
입력 : 2025.06.30 03:30
열하일기 첫걸음
박수밀 지음|출판사 돌베개|가격 1만7000원
박수밀 지음|출판사 돌베개|가격 1만7000원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쓴 '열하일기'는 그가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에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참가하여, 북경과 황제의 여름 피서지 열하(현재 허베이성 청더시)까지 여행한 기록입니다.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떠나 같은 해 10월 27일에 돌아온 여정이었습니다. 여행 중 겪고 보고 듣고 대화하고 생각한 것을 문학, 정치, 경제, 음악, 미술, 건축, 의학 등 다양한 분야와 형식에 걸쳐 담아낸 책입니다. 이 책은 한문학자인 저자가 쓴 열하일기 '안내서'입니다.
압록강 건너 책문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연암은 탁자 위에 다양한 크기의 술잔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자 먹고 싶은 양에 맞는 잔에 술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가축 종류에 따라 우리 만드는 법이 달랐습니다. 생활 기구들이 규격에 맞고 있어야 할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연암은 이를 관찰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는 사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 도덕을 강조하기 앞서 물질적 여건이 우선 갖춰져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후생이 될 것이고 후생이 된 다음에야 정덕(正德), 곧 도덕이 바르게 설 것이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할진대, 어떻게 도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용후생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도구들을 만들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경제 활동보다 도덕을 앞세웠던 전통적 유학의 원리를 뒤집는 혁신적인 생각입니다. 연암은 8월 3일과 4일 북경의 유리창 거리를 방문했습니다. 문방구와 골동품, 서화(書畫)와 서적을 파는 상점들로 가득한 곳이어서 조선 사신들은 반드시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연암은 많은 인파와 번화한 풍경을 보며 오히려 고독감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유리창에 외롭게 서 있다. 내가 입은 옷과 쓰고 있는 것은 중국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용모는 중국 사람들이 처음 보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보게 되었으니 나는 성인도 되고 부처도 되고 현인과 호걸도 된 셈이다."
저자는 당시 연암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꼈으리라 짐작합니다. 무수한 사람 가운데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익명성, 즉 근대 도시의 감수성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연암이 지닌 두둑한 보따리에는 붓과 벼루, 필담 나눈 종이, 꾸준히 적은 일기밖에 없었습니다. 연암은 철저히 보고 깊이 생각하며 자신이 본 풍경을 기록했습니다. 저자는 '열하일기'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열하일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하고, 배우길 원하는 한 문장가의 탐구심과 호기심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