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백제의 내우외환 시기… 소년 왕은 즉위 2년 만에 요절했죠
입력 : 2025.06.26 03:30
웅진 백제
국가유산청과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백제 왕릉이 모여 있는 충남 공주의 왕릉원을 최근 재발굴한 결과, 2호분에 묻힌 임금이 만 14세에 죽은 '소년 임금' 삼근왕(재위 477~479)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무덤에서 나온 어금니 2점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10대 중후반의 것으로 드러났는데, 웅진 백제 시절 이 나이 무렵에 사망한 임금은 백제 23대 왕인 삼근왕뿐이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고대 무덤 대부분은 도굴을 많이 당해 누가 묻혔는지 알기 어려운데, 백제 왕릉 중 주인이 밝혀진 곳은 공주 무령왕릉과 익산 쌍릉(무왕릉)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웅진 백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차근차근 알아보겠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어금니 2점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10대 중후반의 것으로 드러났는데, 웅진 백제 시절 이 나이 무렵에 사망한 임금은 백제 23대 왕인 삼근왕뿐이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고대 무덤 대부분은 도굴을 많이 당해 누가 묻혔는지 알기 어려운데, 백제 왕릉 중 주인이 밝혀진 곳은 공주 무령왕릉과 익산 쌍릉(무왕릉)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웅진 백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차근차근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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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기별 백제의 수도를 표시한 지도예요. 백제는 수도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됩니다.
678년 동안 존속했던 백제에는 대략 세 곳의 수도가 있었습니다. 수도가 어디였는지에 따라서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요. 한성(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도읍했던 시기를 '한성 백제'(기원전 18년~서기 475년), 웅진(충남 공주)에 있었던 시기를 '웅진 백제'(475~538), 사비(충남 부여)가 왕도였던 시기를 '사비 백제'(538~660)라고도 합니다. 지금도 옛 백제의 도시라고 하면 공주와 부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죠.
한성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 ~375) 때 고구려를 비롯한 다른 나라를 압도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은 무리한 토목 공사를 벌여 국가 재정이 흔들렸고,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성(위례성)이 점령당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개로왕은 도주하다가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고 맙니다.
왕은 죽고 수도를 잃었을 뿐 아니라 한강 유역의 영토도 고구려에 빼앗겼습니다. 나라가 망할 지경의 큰 위기에 놓인 것이죠. 이때의 상황을 학계에서 '한성 백제의 멸망'이라 표현할 정도입니다. 최고 관직인 상좌평 자리에 있던 개로왕의 아들(동생이라는 설도 있음) 부여문주는 고구려가 침공했을 때 동맹국 신라에 파견돼 구원병을 얻어 돌아왔습니다.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좌절하지 않았고, 이미 점령당한 한성을 공격했습니다. 고구려군이 일단 한강 북쪽으로 물러난 뒤 부여문주는 22대 문주왕(재위 475~477)으로 즉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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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웅진 백제’ 시대 왕릉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왕릉원 1∼4호 무덤의 모습이에요.
문주왕은 한 달 동안 고구려군과 대치했으나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475년 10월 금강을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남쪽의 웅진에 새로운 방어용 성곽을 짓고 천도(수도를 옮김)를 단행했습니다. '웅진 백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문주왕은 나라의 커다란 위기를 극복하고 백제의 명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웅진 백제는 초기부터 커다란 정치적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왕권이 크게 실추된 반면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고 불린 해(解)씨, 진(眞)씨, 목(木)씨 등 유력 가문이 득세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한때 지금의 대전·세종시 일대까지 남진을 계속해 백제를 압박했습니다. 실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 할 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주왕은 즉위 2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냥을 하러 궁성을 떠났다가 병관좌평(지금의 국방부 장관)인 귀족 해구의 사주를 받은 도적에게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백제 왕실은 다시 큰 위기에 빠지게 됐습니다.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이 즉위했으나 겨우 만 12세였습니다. 삼근왕은 즉위 다음 해인 478년 다른 귀족인 진씨 세력의 힘을 빌려 해구를 공격해 죽였지만, 다음 해에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어린 왕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학자들은 새로 권력을 잡은 진씨 세력의 정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웅진으로 천도한 지 불과 4년 만에 두 왕이 죽었으니 백제의 정치적 상황은 몹시 불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삼근왕이 후사 없이 죽어 개로왕의 직계 왕통도 끊긴 셈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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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왕릉원 2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왼쪽 사진)와 어금니(오른쪽). 만 14세에 사망한 삼근왕의 어금니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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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령왕릉 내부. 무령왕은 백제를 중흥시킨 군주로 평가됩니다. /국가유산청·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여기서 24대 백제 왕으로 즉위한 사람이 문주왕의 조카인 동성왕(재위 479~501)입니다. 동성왕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군주였습니다. 진씨 세력에 의해 옹립됐지만 서서히 진씨 세력을 억압하고 사(沙)씨와 연(燕)씨 같은 신진 귀족들의 힘을 키워 세력 균형을 도모했습니다.
동성왕 때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와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기록이 있고,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무력으로 위협해 복속시키는 등 백제의 군사력도 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동성왕은 백씨 가문의 백가 등 일부 귀족 세력의 반발로 문주왕처럼 사냥을 나섰다가 자객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동성왕이 말년에 사치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결과라는 해석도 있죠.
이제 동성왕의 형제로 추정되는 부여사마가 25대 무령왕(재위 501~523)으로 즉위했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왕이 된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인 데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백가의 반란을 진압해 귀족 세력을 눌렀고, 민생 안정, 부국강병, 대외 교류에 다시 박차를 가했습니다.
무령왕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신라·일본으로 이어지는 국제 네트워크를 재건했고 고구려에 빼앗긴 영토를 상당 부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521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는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한 나라가 됐다)'이란 자신감 넘치는 말을 쓸 수 있었습니다. 백제의 중흥 군주로 평가되는 그는 백제 왕 중에서는 오랜만에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었어요.
이제 무령왕의 아들인 26대 성왕(재위 523~554)은 웅진에서 즉위한 마지막 임금이 됩니다. 성왕은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538년 사비(충남 부여) 천도를 단행해, 웅진 백제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성왕은 신라와의 전쟁 끝에 죽었지만 백제는 이후에도 여전히 군사적으로 신라를 압도했고, 이는 7세기 나당(신라·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