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의회 승인 없인 왕도 세금 못 걷어"… 입헌주의 출발점 됐죠

입력 : 2025.06.25 03:30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19세기 그림으로, 귀족들의 압박에 굴복한 존 왕이 대헌장에 서명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19세기 그림으로, 귀족들의 압박에 굴복한 존 왕이 대헌장에 서명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도서관이 약 80년 전 사본인 줄 알고 단돈 27달러(현재 약 3만6000원)에 구입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문서가, 사실 1300년 영국 왕 에드워드 1세가 서명한 진본으로 판명됐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마그나 카르타는 우리말로 '대헌장(大憲章)'이라고 합니다. 이는 1215년 잉글랜드의 존 왕이 귀족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서명한 문서로, 왕조차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해 근대 입헌주의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지요. 오늘은 이 마그나 카르타로부터 시작된 입헌주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입헌주의의 출발점이 되다

오늘날 영국의 국왕은 정치적 권한이 거의 없는 상징적인 존재예요. 실제로 국가의 통치는 의회와 총리 중심으로 운영되며, 국왕은 법률에 따라 행동해야 하지요. 이러한 정치 체제를 '입헌군주제'라고 하는데, 이 제도의 출발점이 바로 대헌장이었지요.

1215년 잉글랜드의 국왕 존은 '실지왕(Lackland)'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어요.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많은 국토를 잃었죠. 존 왕은 땅을 되찾기 위해 계속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전쟁 자금이 필요해지자, 귀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죠. 이에 분노한 귀족들은 왕권의 전횡을 막고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요구 사항을 정리해 문서로 제출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헌장입니다. 존 왕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대헌장에 서명하지요.

63개 조항으로 이뤄진 대헌장은 왕이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핵심 조항은 '왕은 의회 승인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적법한 절차 없이 누구도 체포되거나 투옥될 수 없다' 등이었어요. 이 조항들은 훗날 '법의 지배'를 표방하는 법치주의 원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헌장은 한 번의 서명으로 끝난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후대 군주들은 이 문서를 반복적으로 재확인했으며, 이는 왕이 법의 제약을 받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정치적 의례가 됐죠.

의회 발전의 초석 됐죠

대헌장으로 국왕의 권력이 제한되면서,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의회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의회는 점차 국왕의 견제자이자 백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아 갔어요. 절대 군주의 권위를 누린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역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의회의 동의를 얻었지요.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왕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신봉했어요. 의회와 갈등이 불가피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충돌은 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들 찰스 1세 때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1215년 작성된 대헌장. 왕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명시한 대헌장은 오늘날 입헌주의의 시작점으로 평가받지요.
1215년 작성된 대헌장. 왕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명시한 대헌장은 오늘날 입헌주의의 시작점으로 평가받지요.
1688년 명예혁명 당시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오른쪽 아래 사람들은 네덜란드 함대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여요.
1688년 명예혁명 당시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오른쪽 아래 사람들은 네덜란드 함대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여요.
명예혁명 시기 의회가 제시한 조건을 수락한 윌리엄과 메리가 1689년 공동 군주로 즉위하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
/위키피디아·영국 도서관
명예혁명 시기 의회가 제시한 조건을 수락한 윌리엄과 메리가 1689년 공동 군주로 즉위하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 /위키피디아·영국 도서관
찰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하며 독단적인 통치를 강화했어요. 외국과의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자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지만, 오히려 의회는 왕의 자의적 과세와 체포를 제한하는 '권리 청원'을 제출하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이 문서에 서명했지만, 1년 만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이후 11년 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의회 승인 없이 세금을 걷고 사치를 일삼는 등 폭정을 이어갔어요.

결국 의회와 왕의 갈등은 종교 문제로 폭발하게 됩니다. 1641년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계 정착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왕과 의회 모두 아일랜드 진압에 동의했지만, 군 지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됩니다. 의회는 왕이 군 지휘권을 남용할 것을 우려해 지휘권을 요구했고, 이에 불만이 컸던 찰스 1세는 결국 병력을 동원해 의회 내 반대파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투쟁에 나섰고,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내전이 발발합니다. 청교도(개혁파 프로테스탄트)들이 의회파에 가담했기에, 이 내전은 '청교도 혁명'의 시작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왕권 제한한 '권리 장전'

내전 초반엔 왕당파가 우세했지만, 의회파는 점차 전세를 뒤집습니다. 특히 의회파 지휘관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으로 승기를 잡으며, 결국 찰스 1세는 처형되고 공화정이 수립됐어요. 그러나 크롬웰은 군을 기반으로 독재 통치를 펼쳐 점차 신뢰를 잃었고, 그의 사후엔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1660년 왕정이 복고되고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어요.

찰스 2세는 표면적으론 성공회를 수호했지만 실제론 가톨릭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죠.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제임스 2세는 노골적으로 가톨릭을 옹호하며 강압적인 종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이자 개신교도인 메리와 그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公) 윌리엄에게 잉글랜드를 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1688년 윌리엄은 약 1만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고, 당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제임스 2세는 저항하지 못한 채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이 사건은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교체했다고 해서 '명예혁명'이라 불리지요.

영국 의회는 부부에게 의회 중심 통치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인 메리와 윌리엄은 1689년 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로 공동 즉위합니다. 같은 해,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법으로 제한하는 '권리장전'을 통과시키지요.

권리장전은 10여 개의 조항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의회의 권한을 분명히 한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의회의 승인 없이는 법을 만들 수 없고, 국왕이 마음대로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특히 의회 동의 없이 세금을 거두거나 상비군을 둘 수 없다는 조항은 국왕의 재정권과 군사권을 제한한 조치였습니다. 또한 의회 선거의 자유, 의회 내 발언의 자유 등도 포함돼 있었어요. 이는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의 핵심 원칙을 제도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윤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