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결혼 축의금, 언제 시작됐을까요
입력 : 2025.06.24 03:30
축의
축의금의 정확한 기원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전통 농촌사회의 상부상조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과거 결혼식은 마을 전체의 잔치였고, 한 집안의 힘으로 치르기에는 벅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음식 재료를 가져오거나 잔칫날 음식 준비를 함께 하며 혼주(보통 결혼 당사자의 부모)를 돕는 공동체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이 점차 음식이 아닌 현금으로 축하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죠.
현금으로 주고받는 축의 문화는 대체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예전처럼 이웃 간 품앗이 방식이 점차 어려워지자 대신 돈을 내는 풍습이 생긴 것이죠.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지금과 유사한 '축의금' 개념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가 남긴 '율곡전서'에는 '해주향약'이라는 규약이 실려 있습니다. 향약이란 지역 주민들이 지켜야 하는 유교 윤리예요. 해주향약에서는 과거 급제, 성인식, 승진, 결혼 등 경사가 있을 때 축하 선물의 종류와 양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경우 무명 세 필과 쌀 다섯 말을 선물하도록 되어 있지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 역시 돈이 아닌 현물과 음식 재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당시 조선은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사회였다는 것을 고려해야 해요. 조선 초기엔 태종과 세종이 화폐 유통을 시도했으나 화폐에 대한 신뢰도 문제 등으로 인해 실패했고, 이후 숙종 대에 상평통보가 전국에 유통되기 전까지 조선에선 면포나 곡식을 화폐처럼 이용했어요. 그렇다면 율곡 이이의 해주향약은 축의금으로 적절한 금액을 규정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죠.
현금 축의를 하는 문화가 좀 더 명확하게 등장하는 시기는 대한제국 시기입니다. 이때 공인(관청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던 사람)이었던 지규식이 남긴 '하재일기'를 통해 당시 축의금 문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는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지규식이 작성한 일기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대체로 10냥에서 20냥 정도의 금액을 축의금으로 냈고, 친밀한 관계일 경우 50냥까지도 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규식은 양반이 아닌 평민이었는데, 도시에 거주하는 평민들도 현금으로 축의금을 내는 문화가 정착된 것을 알 수 있죠. 물론 당시에도 현금 대신 떡, 국수, 술 등의 음식이나 백지, 초 등 현물을 제공하는 경우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농촌 사회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현금 대신 곡식이나 음식을 부조 형태로 내는 풍습이 유지됐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