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습기 품은 공기, 젖은 질감… 빗줄기 없이 '비 오는 날' 그렸죠

입력 : 2025.06.23 03:30

비와 관련된 작품

작품1 - 윌리엄 터너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1844). 캔버스에 오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기차와 고요한 자연이 대비를 이루고 있어요. /런던 내셔널 갤러리
작품1 - 윌리엄 터너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1844). 캔버스에 오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기차와 고요한 자연이 대비를 이루고 있어요. /런던 내셔널 갤러리
온종일 후텁지근한 가운데 비가 내려 몸도 마음도 눅눅해지는 여름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을 평소와는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밝고 또렷하던 모습이 뿌연 잿빛으로 바뀌어 마치 오래된 기억 속 장면처럼 다가오기도 하지요. 비 오는 날 실내에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평소보다 책 읽기에 집중이 잘되기도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은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린다"라고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엔 우리는 감성적으로 더욱 예민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림에서도 날씨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같은 장소라도 햇빛이 강한 날과 흐린 날, 비나 눈이 오는 날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줍니다. 비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 바람의 방향, 사물의 젖은 질감을 화가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물감이나 먹의 농도를 옅게 해서 투명한 번짐을 만들고, 부드러운 붓질로 윤곽선을 흐리는 방식을 썼을 겁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의 기분까지 그림에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겠지요. 오늘은 비와 관련된 작품을 살펴보면서 화가들이 '젖은 분위기'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름의 거센 비바람

〈작품1〉은 영국이 자랑하는 화가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가 그린 '비, 증기, 그리고 속도'입니다. 거센 비바람을 뚫고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그린 작품이지요. 화면은 짙은 안개와 물기 머금은 공기로 가득합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기관차는 수증기를 내뿜으며 철로 위를 달리고 있고, 런던 템스강 위의 철교와 교각 아치는 희미하게 보입니다.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와 자연의 폭풍우가 뒤섞여 하늘과 강, 땅의 경계조차 흐릿합니다. 그림 왼쪽 아래를 자세히 보면 자그마한 배를 젓고 있는 뱃사공이 보이는데,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아슬아슬해요. 이 조각배는 철로를 달리는 강철의 증기기관차와 대조를 이룹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자연의 위협을 기계로 넘어서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그림에서 터너는 빗속 경치를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신, 번지는 물감으로 대기의 흐름과 속도를 강조했습니다. 터너의 그림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미술관에서 실물을 보는 것이 아주 다른데요. 실물 작품을 보면 공기가 훨씬 생동감 있게 입체적으로 느껴진답니다.

일본 에도 시대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쇼노의 소나기'〈작품2〉는 갑작스러운 비를 만난 사람들이 서둘러 비를 피하는 모습을 담은 목판화입니다. 이 그림에는 사선이 돋보입니다. 빗줄기는 사선으로 내리고, 언덕의 경사도 사선인데 방향은 서로 다릅니다. 나무는 바람에 의해 사선으로 기울어 있고, 사람들도 허리를 굽힌 채 사선을 이루며 걷고 있습니다.

이 구조 덕분에 그림에는 속도감이 생깁니다. 세차게 내리는 비와 거센 바람, 급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긴장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만약 수직선이나 수평선을 사용했다면 이런 생동감은 잘 전달되지 않았겠지요.

히로시게의 대담한 구도와 선, 색감은 당시 유럽 미술계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빈센트 반 고흐는 히로시게의 판화 몇 점을 유화로 따라 그려보기도 했답니다.

우산과 무지개

빗줄기를 그려 넣지 않아도 비 오는 풍경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 우산이 등장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비가 오는 중이거나 곧 올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작품3〉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가 그린 '우산'입니다. 번화한 파리 거리에서 우산을 든 사람들로 화면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림 왼쪽에는 우산 없이 걷는 여성이 보이는데, 한 신사가 뒤에서 살짝 자신의 우산을 씌워주려는 듯한 모습입니다.

전체 화면은 흐린 하늘을 반영하듯 회색과 푸른 색조로 다소 어둡게 채색되어 있지만, 거리 분위기는 오히려 활기차 보입니다. 화면 가운데에는 모자를 쓴 귀부인이 두 딸과 함께 외출한 모습이 보이고, 뒤로는 한 여성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산을 펼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면 막 접고 있는지도 몰라요. 빗방울이 막 떨어지기 시작했을까요? 아니면 비가 멈춘 뒤일까요? 그림은 그런 미묘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작품4〉는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눈먼 소녀'예요. 비가 그친 후의 풍경을 담은 이 작품에는,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떠돌이 자매가 잠시 풀밭에 앉아 쉬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언니는 무릎 위에 콘서티나(아코디언의 일종)를 올려놓고 있어요. 그리고 목 부분을 자세히 보면, '맹인에게 자비를(PITY The BLIND)'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조금 전까지 비가 왔었다는 단서는 위쪽에 떠 있는 쌍무지개입니다. 동생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지만, 눈먼 언니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대신 그는 비 갠 뒤의 세상을 다른 감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코로는 비 온 뒤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얼굴에는 햇살의 온기가 닿고, 손끝으로는 풀잎의 물기를 느끼며, 귀로는 벌레를 찾는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있겠지요.

밀레이는 눈먼 소녀를 등장시켜 보지 않고도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각을 조명합니다. 빗방울이 그친 풍경을 시각이 아닌 촉각과 후각, 청각으로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그림은 조용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작품2 -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목판화) '쇼노의 소나기'(1833~1834년경). 세차게 내리는 비와 거센 바람을 사선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위키피디아
작품2 -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목판화) '쇼노의 소나기'(1833~1834년경). 세차게 내리는 비와 거센 바람을 사선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위키피디아
작품3 -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우산'(1886년경). 캔버스에 오일. 어두운 색조를 사용해 빗방울을 그리지 않고도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표현했지요. /내셔널 갤러리
작품3 -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우산'(1886년경). 캔버스에 오일. 어두운 색조를 사용해 빗방울을 그리지 않고도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표현했지요. /내셔널 갤러리
작품4 - 존 에버렛 밀레이의 '눈먼 소녀'(1856). 캔버스에 오일. 소나기가 지나간 뒤 자매가 손을 잡은 채 들판 위 짚 더미에 앉아 있어요. /버밍엄 미술관
작품4 - 존 에버렛 밀레이의 '눈먼 소녀'(1856). 캔버스에 오일. 소나기가 지나간 뒤 자매가 손을 잡은 채 들판 위 짚 더미에 앉아 있어요. /버밍엄 미술관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