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왕도 손댈 수 없는 기록… '쓰지 말라'는 말까지 적었죠

입력 : 2025.06.19 03:30

사관과 사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에요. 조선왕조실록은 같은 내용의 책을 여러 권 만들어 전국에 나눠 보관했는데, 사진 속 실록은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史庫)에 보관돼 있었어요.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에요. 조선왕조실록은 같은 내용의 책을 여러 권 만들어 전국에 나눠 보관했는데, 사진 속 실록은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史庫)에 보관돼 있었어요.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12·3 비상계엄' 관련 수사를 맡게 되는 조은석 특별검사가 지난 13일 "사초(史草)를 쓰는 자세로 세심하게 살펴가겠다"는 말을 했어요. '사초'라는 것은 조선 시대에 역사 편찬을 담당하던 사관(史官)이 기록한 역사서의 초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검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수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이 훗날 역사를 이루는 초고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 규명'에 집중하겠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어요. 정말 그렇게 사초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사관과 사초는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던 걸까요? 이것은 임금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척 엄중한 의미였습니다.

말에서 떨어진 태종 "사관이 모르게 하라!"

조선 개국 초인 1404년(태종 4년) 2월 8일의 일이었어요. 사냥에 나선 태종 임금이 말을 달리며 화살로 노루를 쏘다가 그만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놀라 달려가서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상황에서 임금은 아프다는 말도 없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창피해 죽겠으니 절대로)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그런데 이 일과 태종의 말은 태종실록에 모두 고스란히 기록됐습니다. 귀신같이 정보를 입수하고,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도 아랑곳없이 사초에 버젓이 쓰는 사람이 바로 사관이었던 것이죠.

당시 민인생이라는 사관은 임금이 사냥을 갔을 때 복면을 쓰고 몰래 뒤따라가기도 했답니다. 심지어 왕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병풍 뒤에 숨거나 초대받지도 않은 연회장에 불쑥 붓과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고 해요. 태종이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으냐'고 야단을 치자 민인생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사관 위에서 하늘이 지켜보고 있으니, 바르게 쓸 수밖에 없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임금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던 '사초'

표준국어대사전이 설명하는 '사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역사의 편찬을 맡아 초고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예문관 검열 또는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이른다.'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을 기록하는 일을 맡던 관청이고, 승정원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과 비슷한 곳입니다. 사관은 대략 이런 기관에 소속돼 있었는데, 특히 예문관과 춘추관을 겸직하는 관리 8명이 매일 주요 사건과 왕명 등을 기록해 사초를 만들던 사관이었다고 합니다. 승정원 주서는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를 기록했죠.

드라마에는 주로 병풍처럼 멀찌감치 뒤편에 앉아 한마디 말도 없이 줄곧 붓글씨를 쓰는 역할로 나오지만, 현실에서 사관의 중요성은 무척 컸습니다. 실력과 가문이 모두 좋은 인재들이 뽑혔고, 자부심과 사명감도 대단했다고 해요.

바로 이런 사관들이 기록한 실록의 초고가 사초였습니다. 그런데 사초는 분량이 어마어마했어요. 사초를 토대로 편찬한 조선왕조실록의 분량이 1893권 4965만 자(字)에 이르니, 사초는 얼마나 양이 많았겠어요? 그래서 물자를 아끼기 위해 실록을 편찬한 뒤에는 세초(洗草)라는 것을 했습니다. 자하문 밖에서 사초를 물에 씻어 없애고, 그 종이를 제지 원료로 재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초는 실록 편찬 전까지 대단히 큰 무게를 지닌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록을 편찬하는 사람들 말고는 그 누구도 미리 보거나 내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임금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를 어긴 왕이 조선 왕조에 단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폭군으로 평가되는 10대 임금 연산군이었습니다.

성종실록의 사초에 문신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실려 있었고,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 임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됐습니다. 이 정보가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 1498년 숱한 선비들이 희생당한 무오사화의 단초가 됐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이후엔 '사초의 내용을 알려고 하는 것은 연산군 같은 폭군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져 어느 임금이라도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됐다고 합니다.

의심스러운 기록에 대한 의심도 기록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한 가지 들 만도 합니다. '과연 실록의 사초를 쓴 모든 사관이 준엄하게 사실만을 기록했을까?' 사실을 불완전하게 기록하거나, 편견이 개입됐거나, 악의를 지니고 의도적으로 '가짜 뉴스'를 기록한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의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선 그런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지점도 볼 수 있습니다. 6대 임금 단종이 즉위한 직후인 1452년 7월 4일 세종실록 편찬과 관련한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로부터 24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당시 좌의정이 말 한 필을 뇌물로 받았다는 소문으로 인해 사직했는데, 사관이 그 좌의정을 아주 나쁘게 비난하는 평을 사초에 적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좌의정은 회의가 열리기 다섯 달 전 89세로 별세한 인물,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논의한 끝에 '내가 아는 황희 정승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적은 이호문이란 사관이 여러 부정부패를 저지른 인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회의는 '사초의 이 부분은 가짜 뉴스니 삭제하자'는 결론에 가까워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세종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이호문의 악평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아무리 미심쩍다 하더라도 사초의 기록을 함부로 없앨 수는 없다는 최종 판단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단종실록에는 그 기록을 의심하는 회의에 대한 기록 역시 남아 있습니다. 하응백 문학평론가는 "역사를 편찬한 사람들이 후대를 향해 '둘 다 보아라, 그리고 판단하라'는 말을 걸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조선 시대 기록 정신의 냉혹함"이라고 평가합니다.
중종실록의 일부. 곳곳에 붉은색 한자가 보여요. 이는 실록을 인쇄하기 전 틀린 글자를 수정한 ‘교정본’이랍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빨간펜’으로 수정 사항을 표시해놓은 거예요.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중종실록의 일부. 곳곳에 붉은색 한자가 보여요. 이는 실록을 인쇄하기 전 틀린 글자를 수정한 ‘교정본’이랍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빨간펜’으로 수정 사항을 표시해놓은 거예요.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 6·25전쟁 때 불탄 건물을 1992년에 복원했습니다.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 6·25전쟁 때 불탄 건물을 1992년에 복원했습니다.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