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디자인·건축 이야기] 세운상가·잠실 주경기장 지은 건축가…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 보여주죠

입력 : 2025.06.17 03:30

김수근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취조실이 있는 5층은 유독 창문이 작아요. /뉴시스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취조실이 있는 5층은 유독 창문이 작아요. /뉴시스
지난 10일 국가 폭력의 상징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했어요.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가 숨을 거둔 곳입니다. 건물 5층에 있는 취조실은 안과 밖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창문을 작게 만들었고, 계단은 나선형으로 만들어 눈을 가리면 현재 위치를 가늠하지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이곳을 만든 사람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었다는 사실, 알고 있었나요?

김수근은 일본 도쿄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28세에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에 당선되면서 크게 주목받았어요. 원래 국회의사당은 남산에 지을 계획이었답니다. 비록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는 이후 정부 인사들의 신뢰를 받으며 대형 프로젝트를 많이 맡게 됐죠. 반공 이념을 표방한 자유센터(1963), 우리나라 주상 복합의 시작으로 불리는 세운상가(1968), 여의도 개발 계획(1969) 등이 대표적이에요.

김수근은 우리나라만의 전통과 느낌을 담은 건축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논란이 생기기도 했죠. 그가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를 살려 설계한 국립부여박물관(1967)은 외관이 마치 일본식 건물처럼 보인다는 '왜색 논란'이 있었거든요. 심지어 정문은 신사 앞에 세우는 '도리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철거됐죠. 승승장구하던 김수근에게 이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국적인 건축이란 무엇인가'를 더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는 건물에서 '빈 공간'에 주목했어요. 예를 들어 방이나 홀처럼 중심이 되는 공간은 '양(陽)의 공간', 그 주변을 감싸는 복도·계단 같은 곳은 '음(陰)의 공간'이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음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과 아늑함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이런 철학이 가장 잘 담긴 건물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공간 사옥'입니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한국의 골목을 닮은 좁고 복잡한 통로를 지나며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게 설계됐죠. 내부 벽에는 커다란 창도 있어서 서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했고, 천장은 일부러 낮게 만들어 아늑함을 느끼게 했답니다.

그의 다른 대표작으로는 마산 양덕성당(1978), 서울 경동교회(1981) 등이 있어요. 특히 경동교회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마치 기도하는 손처럼 보이는데요. 창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예배당으로 들어가면 속세에서 벗어나 피난처에 온 느낌을 줍니다. 이 외에도 김수근은 백자 항아리의 곡선을 담은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1984) 같은 건물을 설계하며 '한국적 아름다움'을 추구했어요.

김수근은 권력과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위한 따뜻한 공간을 만든 건축가이기도 했어요. 그런 점에서 그의 건축은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요.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