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 홀린 '신령하고 요망한 풀'… "네 살 아이도 피운다"

입력 : 2025.06.12 03:30 | 수정 : 2025.06.12 04:52

담배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으로, 담배를 만드는 과정을 묘사했어요. 작두로 담배를 가늘게 썰고(왼쪽 위) 한편에선 담뱃잎을 갈라 줄기를 빼고 있습니다(오른쪽 아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으로, 담배를 만드는 과정을 묘사했어요. 작두로 담배를 가늘게 썰고(왼쪽 위) 한편에선 담뱃잎을 갈라 줄기를 빼고 있습니다(오른쪽 아래). /국립중앙박물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벌인 수백억 원대 소송의 2심 판결이 조만간 내려질 예정입니다. 이제까지 담배 때문에 폐암이나 후두암이 발생해서 건강보험 급여에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지요. 이 소송은 공공기관이 직접 담배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한 소송이라는 점에서 결과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까요?

임진왜란 후 조선에 들어와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16세기, 임진왜란(1592~1598) 이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담배의 원산지는 아메리카 대륙입니다. 15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이곳의 담배를 유럽으로 가져갔고, 16세기에 유럽 상인들이 일본에 전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굉장히 신기하게 여겼어요. 그래서 담배를 '남령초(南靈草)'라고 불렀다고 해요. '남쪽에서 온 신령한 풀'이라는 뜻이지요. 담배는 '요망한 풀'이라는 의미의 '요초(妖草)'로도 불렸는데, 그만큼 과거에도 담배의 중독성은 대단했습니다. 담배는 조선에 들어온 뒤 짧은 시간 안에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급기야는 어린아이들까지 담배를 피웠어요. 17세기 조선에 표류해 13년간 머물렀던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조선에서는 4~5세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는 것이었지요.

아무 데서나 함부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를 불쾌해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예를 들면 한 유생이 정승 채제공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또 관리나 군인들이 근무 중에 담배를 피우느라 자리를 이탈하거나, 과거 시험장에 담배를 들고 들어와 벌을 받는 사례들도 있었어요.

당시에도 흡연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정조 임금은 "부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며 흡연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 반면 정조의 신하이자 실학자인 이덕무는 좀 다르게 생각했어요. 그는 "요리하다 담배를 피우면 담배 가루가 떨어져 음식을 모두 버리게 된다"고 할 정도로, 특히 여성의 흡연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요.

그럼에도 담배는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도 손님용 담배를 준비해두는 게 일종의 예절이었습니다. 당시엔 담뱃대를 이용해 담배를 피웠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긴 담뱃대를 사용했습니다. 일부 고위층은 담뱃대 길이가 너무 길어 담뱃불 붙여주는 하인이 따로 있어야 할 정도였지요.

담배 농사로 이익 보기도 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담배가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얘기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면 가래가 끼거나, 담뱃진이 여기저기 묻으며 주변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엔 요즘처럼 건강 걱정이 우선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담배가 나라 경제에 좋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담배가 귀하고 돈이 된다고 생각해서 쌀을 심어야 할 비옥한 농토에 담배를 심는 일이 많아졌거든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식량 생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이 때문에 담배 재배를 금지하자는 주장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담배 농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담배가 좋아서도 있지만, 실제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담배는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주요 작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지자 이에 통탄하며 자결한 매천 황현은 생전에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담배 농사를 시작하니 생활이 넉넉해졌다"고 했을 만큼 괜찮은 돈벌이 수단이었습니다.

개항 이후부터 궐련형 담배 유행

조선 후기에는 개항을 계기로 외국의 여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중 하나가 수입 담배였죠. 외국 상인들은 담뱃잎을 잘게 썰어 종이로 말아 만든 '지궐련'을 들여왔습니다. 이는 담뱃대에 잘게 썬 연초를 다져 넣어 피웠던 조선의 전통적인 흡연 방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죠. 게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거리에서 담뱃대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담뱃대를 쓰는 전통 방식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궐련형 담배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담뱃대 사용이 구시대적인 풍습으로 간주됐던 것이죠.

이때 조선의 일부 지식인은 "조선의 담배가 맛도 좋고, 토질도 잘 맞고, 값도 싸다"며 국산 담배를 더 사자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했던 담배는 일본산이었고, 그다음이 미국산 담배였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 크게 바뀝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사람들에게 담배를 더 많이 팔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적극 개입했습니다. 1921년 '연초 전매령'을 통해 담배에서 나오는 수익을 식민 통치 예산으로 활용하려고 했죠. 전매는 국가가 특정 물품의 제조와 판매를 독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조치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큰 부담이 됐습니다. 총독부는 담배 농민에게 낮은 가격으로 담배를 사들이고, 조선 사람들에게 담배를 강제로 떠넘겨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1925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담배 농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납니다. 담배를 보관하는 사무소 건물을 부수거나, 담배 농사를 포기하는 '파업'까지 벌였다고 해요. 이 당시 담배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조선 경제와 통치 전략에도 얽혀 있던 물건이었던 셈이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던 전매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1945년엔 첫 번째 국산 담배인 '승리'가 만들어졌어요. 이름처럼 해방의 기쁨을 담은 상징적인 담배였죠. 가격은 한 갑에 3원이었습니다. 당시 3원이면 책 한 권을 살 수 있었으니 꽤 비싼 담배였습니다.

이후 194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군용 담배인 '화랑'이 만들어집니다. 이 담배는 군인들에게 지급되면서 수십 년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일부 군가는 가사에 이 담배를 언급하기도 했을 정도였어요. 오늘날 담배는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지만, 그와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이지요.
조선 화가 신윤복이 그린 ‘야금모행’. 통행금지를 어기고 늦은 밤 길을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어요. 기생(오른쪽에서 둘째)은 담뱃대를 물고 있는데, 남녀노소 담배를 피웠던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화가 신윤복이 그린 ‘야금모행’. 통행금지를 어기고 늦은 밤 길을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어요. 기생(오른쪽에서 둘째)은 담뱃대를 물고 있는데, 남녀노소 담배를 피웠던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군용 담배 ’화랑’. 한 갑에 20개비씩 들어 있었어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군용 담배 ’화랑’. 한 갑에 20개비씩 들어 있었어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조선 후기에 사용된 담뱃대. 조선 시대엔 지위가 높을수록 긴 담뱃대를 사용했어요. /국가유산청
조선 후기에 사용된 담뱃대. 조선 시대엔 지위가 높을수록 긴 담뱃대를 사용했어요. /국가유산청
이한 작가·'한잔 술에 담긴 조선' 저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