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휴일 아침 기습당한 하와이… 美 '치욕의 날' 됐죠
입력 : 2025.06.11 03:30
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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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미국 전함 ‘USS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AFP 연합뉴스
일본 팽창에 제동 건 미국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내세우며 아시아에서 강력한 제국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이 아시아 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정치 구호인데요.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 권역을 묶어 지배하고 이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요.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진출하며 군사적 영향력을 점차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경계심을 불렀답니다. 1937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요. 그러자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파기했습니다. 1911년 체결된 이 조약은 양국이 서로에게 최고의 대우를 하기로 정한 조약이었죠. 미국은 특히 중국의 장제스를 지원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려 했고, 1941년부터는 일본에 석유·철강·고무 같은 전략물자 수출을 금지하는 제재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군함과 비행기, 탱크를 움직일 수 있는 석유의 80%를 미국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이 조치는 치명적이었어요.
그러자 일본 내부에서는 두 의견이 대립하게 됩니다. 하나는 '미국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였고, 다른 하나는 '미국과 전면전을 벌여 자원을 직접 확보하자'는 군부 강경파였지요. 그리고 강경파의 중심에 훗날 도쿄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있었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면서 일본에 절호의 기회가 왔어요. 소련이 독일과 싸움에 집중해야 하니, 일본은 후방 공격의 위험 없이 아시아 지역에서 침략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 당시 미국과 일본은 협상을 지속하며 충돌을 피하고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양국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고 11월 말이 되자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 첫 시작은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함대를 기습해 태평양의 미 해군을 무력화하는 것이었죠.
미 전함·항공기 집중 공격했죠
진주만은 미국 하와이 오아후섬에 있는 거대한 해군 기지로, 미 태평양 함대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미 태평양 함대는 1940년부터 진주만에 주둔해 있었는데요. 약 100척의 해군 함정 외에도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머물고 있었지요.
일본군 수뇌부는 아시아에서의 침략을 지속하기 위해선 동남아시아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판단하고 점령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그 전에 미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지 않으면 작전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판단했지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일본은 항공모함 6척과 전투기·폭격기 등 총 40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하와이 북서쪽 해상에서 몰래 접근했죠.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평온한 휴일 아침에 일본의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감행한 기습이었죠. 일본군 비행기는 미 해군의 거대한 전함과 활주로를 집중 타격했고, 두 번째 공습에서는 항공기 격납고와 공항 시설이 주 공격 대상이 됐습니다. 공습은 불과 몇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미 해군의 주력 전함 4척이 침몰하고 전투기 180여 대가 파괴됐으며 수천 명의 군인이 전사했습니다. 특히 전함 'USS 애리조나호'가 침몰하면서 1000여 명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었어요. 진주만 공습은 미국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 영토가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첫 사례였어요.
세계 전역으로 전쟁 확산돼
공습 다음 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기습 공격을 공식 발표했어요.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하원을 통과했고, 미국은 참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일본을 지지하며 미국에 선전포고,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양쪽 전선에 참전하게 됐어요. 이제까지 고립주의를 지켜오던 미국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죠.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의 불씨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며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이 된 것입니다.
전쟁 초기 일본은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세력을 넓혔지만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이 곧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미국은 짧은 시간 안에 전함과 항공기를 대량생산하고 대규모 징집령을 내려 수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합니다.
1942년 6월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미 해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미리 해독해 공격 계획을 파악했고, 이 전투에서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격침하는 대승을 거뒀어요. 항공 전력에 큰 손실을 입은 일본은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이후 미군은 태평양 섬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며 점차 일본 본토로 진격하지요.
일본은 '가미카제'라는 자살 공격대까지 동원하며 미군의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결국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하죠.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같은 달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전쟁이 종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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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만 공습 다음 날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을 하고 있어요. 이후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미 의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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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년 미국에서 제작된 선전 포스터. 폭발하는 함선 위로 남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고 ‘12월 7일을 복수하라’라고 적혀 있어요.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복수하자는 의미예요.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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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2월 AP의 종군기자 조 로즌솔이 찍은 사진. 미군이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인 일본 이오지마에서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어요. 미군은 태평양 섬들을 하나씩 점령하며 서서히 일본을 압박했습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