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하루는 이 산을 만드는 데 썼을 것"

입력 : 2025.06.05 04:09

금강산 관광

단풍이 붉게 물든 금강산의 가을 풍경. 북한 조선중앙TV가 2023년 가을 촬영했어요. 금강산은 곧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전망이에요. /조선중앙TV
단풍이 붉게 물든 금강산의 가을 풍경. 북한 조선중앙TV가 2023년 가을 촬영했어요. 금강산은 곧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전망이에요. /조선중앙TV
금강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유력하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자문 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북한이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금강산에 대해 등재 권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금강산은 탁월한 아름다움으로 오랫동안 찬사를 받아 온 명승지면서, 수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 그 경관이 뿌리내려 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금강산은 높이 1638m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휴전선 이북인 강원도 금강군·통천군·고성군에 걸쳐 있는 산인데, 빼어난 경치로 이름 높아 근대적 관광 개념이 자리 잡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승지였습니다.

제주 갑부의 평생 소원은 '금강산 유람'

삼국시대부터 신라 화랑들이 금강산을 유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여생을 보냈다는 곳도 금강산이었어요. 금강산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는데 조선 초 '태종실록'에 '중국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김시습·이이·정철 같은 조선시대 문인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고, 정선은 '금강전도'를 비롯한 여러 금강산 그림을 그렸죠. 정조 임금 때 제주도에서 큰돈을 벌어 가난한 백성을 도와준 김만덕이란 여성이 있었는데, 임금이 그에게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김만덕은 결국 소원을 이뤘습니다.

조선시대 한양(서울)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보통 북쪽 원산으로 갔다가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어요.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험하지 않아 선호됐다고 합니다.

금강산 관광을 위한 116㎞ 전기철도

개화기 이후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금강산은 꼭 가봐야 할 명소였습니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897)을 쓴 영국 여행가 이저벨라 버드 비숍은 금강산에 대해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도 초월한다"고 했습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6세 아돌프(재위 1950~1973)는 왕세자 시절인 1926년 조선을 방문해 경주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는데, 금강산을 구경하고는 "신이 (성경 기록의 7일 동안) 세상을 창조할 때 하루는 금강산을 만드는 데 썼을 것"이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1910년 이후 일본인들도 앞다퉈 금강산 관광에 나섰습니다. 구메 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라는 사업가는 1919년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해 금강산으로 통하는 철도의 건설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1931년 철원에서 내금강 사이 116.6㎞ 길이의 '금강산선'이 완공됐습니다.

경성(서울)에서 경원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철원역에서 동쪽 금강산선으로 꺾여 내금강역까지 가는 것이었죠. 금강산선은 노면전차를 제외하고는 한반도 첫 '전기철도'라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지형이 험해 평균 시속이 30㎞ 정도였고,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가는 데 4시간가량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원산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열차를 타고 금강산까지 갈 수 있게 됐던 것입니다. 1930~40년대에 금강산을 구경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철도를 이용했습니다. 교과서에 실렸던 기행문 '산정무한'(1941)을 쓴 소설가 정비석 역시 금강산선을 타고 내금강역에 도착했습니다. 금강산선은 화물 수송과 자원 수탈의 역할도 맡았습니다.

성철 스님과 어머니의 '금강산 상봉'

1940년 봄, 경남 산청에서 온 한 중년 여성도 이 열차를 타고 금강산을 찾았습니다. 그는 훗날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이 되는 성철(1912~1993) 스님의 모친인 강씨였습니다. 속세와 연을 끊고 출가한 뒤 금강산 마하연이란 절에 머무르고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철 스님은 반가운 마음도 꾹 참은 채 먼발치서 짐짓 퉁명스럽게 "왜 오셨습니까?"라고 했고, 모친은 울음을 삼키며 이렇게 내뱉었다고 합니다. "나는 스님 안 보러 왔다! 금강산 구경하러 왔다!" 절에서는 논의 끝에 '그래도 어머니를 맞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성철 스님도 마음을 누그러뜨려 마침내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한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목적이 관광이었던 금강산선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일제에 의해 '불요불급선(당장 필요하지 않은 철도 노선)'으로 지목돼 상당 부분 뜯겨 나갔습니다. 이후 분단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폐선됐습니다. 만약 다시 개통한다면 새로 놓는 수준의 공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꼭 10년만 빗장 풀렸던 '그리운 금강산'

해방 이후 북한 땅이 된 금강산은 대한민국 국민이 오래도록 갈 수 없어 애태우며 그리워하는 장소였습니다. 동요 '금강산'(1953)과 가곡 '그리운 금강산'(1961)이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죠.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1000여 마리를 이끌고 방북한 뒤 남북 협력이 활기를 띠었고, 금강산 관광 사업도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동해항에서 배를 타고 북한 땅으로 가서 외금강 일대를 관광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단 이후 5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필자는 2000년에 이 방식으로 금강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요. 과연 금강산이 아름다운 산인 것은 맞지만, 일부 개방된 등산로만 걸어야 했고 곳곳에 체제 선전용 기념물이 도사리고 있었던 데다 북한 측 감시원이 계속 따라다니는 탓에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2003년부턴 육로 관광이 가능해졌고 2007년에는 내금강 일부 구간도 개방됐습니다.

그러나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을 갔던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고, 금강산 관광 사업은 10년 만에 중단됐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2019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진다'며 현대아산이 건설한 금강산 시설들을 철거하고 다시 지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측에서 지은 시설은 대부분 무단 철거됐지만 북한이 새 건물을 짓는 일은 시작하지도 못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내산총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금강산을 그렸어요. 정선은 이 작품을 포함해 여러 점의 금강산 그림을 그렸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내산총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금강산을 그렸어요. 정선은 이 작품을 포함해 여러 점의 금강산 그림을 그렸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금강산 철도 교량.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키로’라는 글귀가 걸려 있어요. 금강산선은 철원역에서 출발해 내금강역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죠. /남강호 기자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금강산 철도 교량.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키로’라는 글귀가 걸려 있어요. 금강산선은 철원역에서 출발해 내금강역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죠. /남강호 기자
2008년 3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운전하는 자동차들이 금강산 온정리 외금강 호텔에 들어서고 있어요. /오종찬 기자
2008년 3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운전하는 자동차들이 금강산 온정리 외금강 호텔에 들어서고 있어요. /오종찬 기자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