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국가 위기에 일어선 시민들… 세계 곳곳의 숨은 영웅이죠
입력 : 2025.06.04 03:30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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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을 들고 있는 레지스탕스 대원(왼쪽). 1944년 미군이 프랑스에서 촬영했어요.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우리 역사에서 의병은 임진왜란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병과 비슷한 민간 저항 운동은 세계 다른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때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답니다.
프랑스를 지키려고 한 시민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 나치의 군대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와 다름없었던 프랑스의 '비시(Vichy) 정부'는 수많은 프랑스 노동자들을 독일 공장으로 내보냈고, 수만 명의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세력을 조직해 나치 독일에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이들을 '레지스탕스'라고 부릅니다. 프랑스어 레지스탕스(Résistance)는 '저항'이라는 뜻이죠. 초기에는 대원들이 많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와 영국 군인들이 수용소를 탈출하는 것을 돕고, 프랑스 내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해 독일군의 발을 묶었습니다. 또 몰래 신문을 발행해 독일이 퍼뜨리는 조작된 정보에 맞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어요.
레지스탕스 구성원은 정치적 성향도, 출신 지역도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도 계파가 나뉘었어요. 그들을 하나로 묶은 인물이 바로 '장 물랭(1899~1943)'이에요. 프랑스 해방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인 샤를 드골은 그에게 레지스탕스 통합을 지시했고, 장 물랭은 주요 지역의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접촉해 공동 목표를 강조하며 조직을 통합했죠. 레지스탕스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프랑스 내 주요 정보를 수집하고 독일군을 교란하며 프랑스 해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답니다.
스페인 게릴라, 나폴레옹을 흔들다
영화나 뉴스에서 종종 등장하는 '게릴라'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이는 소규모 전쟁을 뜻하는 스페인어 '게리야(guerrilla)'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이 벌이는 비정규전을 뜻하는데, 그 기원은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06년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침공에 실패한 뒤 영국에 대한 경제 봉쇄 조치인 '대륙 봉쇄령'을 선포합니다.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무역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죠. 그런데 포르투갈이 이에 불응했고 나폴레옹군은 1807년 포르투갈 원정에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을 경유한 프랑스 군대는 무려 10만명이 넘는 군대를 마드리드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 주둔시킵니다. 사실상의 군사 점령이었죠.
이후 스페인에 대한 프랑스의 내정 간섭이 심해집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히기도 했죠. 그러자 1808년 5월, 성난 마드리드 군중이 프랑스 주둔군에 맞서 봉기했고, 무장 투쟁의 물결이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됐습니다.
스페인 게릴라엔 농민들과 전직 군인, 심지어는 가톨릭 사제들까지 합세했어요. 스페인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조직된 이들은 주로 150~200명 단위로 대오를 갖추어 기습 공격을 하거나 통신선을 파괴하고, 보급품을 약탈하는 등 끊임없이 프랑스군을 괴롭혔어요. 스페인의 험준한 산악 지형은 기습과 은폐에 적합한 환경이었죠.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략에 저항해 스페인과 영국, 포르투갈 동맹군이 벌인 전쟁을 '반도 전쟁(1808~1814)'이라고 합니다. 전쟁 기간 중 투입된 프랑스군은 약 30만명이었는데, 게릴라에 의해 전사한 프랑스군만 수만 명 규모였다고 해요.
750년 억압 끝의 반격
아일랜드는 1171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침공 이후 약 750년간 영국의 간섭과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오랜 기간 아일랜드인들은 종교적 차별(가톨릭 탄압)과 경제적 수탈, 정치적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죠.
아일랜드인들은 끊임없이 자치를 요구해왔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19세기 말 아일랜드에 자치 정부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특히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아일랜드 자치와 관련된 모든 논의가 중단됐습니다. 그러자 아일랜드의 급진 민족주의자들은 1916년 4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주요 시설을 점거합니다. 이들은 '자치'를 넘어 '독립'을 주장했죠.
봉기를 주도했던 이들은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 빈민층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국 지배하의 구조적 빈곤과 차별에 맞서 싸우고자 했죠. 갑작스러운 무장 투쟁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자, 처음엔 아일랜드 시민들조차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하지만 영국이 봉기를 강경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신속하고 잔혹하게 처형하면서 여론은 급격히 돌아서게 됩니다.
이후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신페인당'이 아일랜드 지역에 배정된 105석 중 73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습니다. 이들은 이듬해 일방적으로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합니다. 봉기에 나섰던 아일랜드 의용군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정규군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으로 재편됐고, 영국과의 무장 충돌이 본격화됐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IRA'를 들으면 급진적인 테러를 일삼는 무장 단체를 떠올리지만, 이는 1960년대 이후 분파된 일부 조직을 의미해요.
IRA는 병력과 무기 모두 영국에 열세였기 때문에 야간 습격, 암살 등 비정규 게릴라 전술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약 2년간의 독립전쟁(1919~1921) 끝에 영국과 아일랜드는 휴전 조약을 맺었고,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 내 자치령 형태의 자유국이 됩니다. 이때 현재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혀 아일랜드와 나뉘게 됐죠. 이후 아일랜드는 1949년 영연방을 탈퇴하며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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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으로 여겨지는 장 물랭. 그는 나치에게 고문을 받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어요. 그때 목에 생긴 상처를 감추기 위해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고 합니다.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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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 프랑스 군인들(오른쪽)이 봉기에 가담한 마드리드 시민들을 처형하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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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년 아일랜드 무장 봉기 이후 수도 더블린의 모습. 파괴된 건물들이 보여요. 당시 영국군은 대포로 시내를 포격하며 봉기를 강경 진압했어요. /아일랜드 국립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