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은 그림… 불안·이산의 아픔 담았죠
입력 : 2025.06.02 03:30
6·25 전쟁 시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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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 장욱진의 ‘자화상’(1951). 종이에 유채. 궁핍했던 전쟁 시기에 엽서만 한 크기(10.8×14.8㎝)로 남긴 화가의 대표작이에요. /장욱진미술문화재단
6·25 전쟁이 지속됐던 3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리고 전쟁 직후 일상을 회복하기까지 미술계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전쟁 통에 무슨 그림이라도 그렸겠나' 싶지만, 화가들은 결코 붓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물감과 종이도 구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삶은 지속되었고 예술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당시 제작된 작품에는 처참한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등 평범한 인간이 겪었던 전쟁에 대한 경험이 솔직하게 담겨있습니다. 모두가 전쟁이 끝나고 어서 평화로운 날이 돌아오길 바라며 그림을 그릴 뿐이었지요.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무너진 집을 새로 짓고, 끊어진 다리를 복구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잿더미 위에 공장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우뚝우뚝 서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전쟁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이 땅에 전쟁의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아서는 안 돼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뜻을 기리고, 그들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남겨진 자들의 슬픔까지도 기억해야겠죠. 현충일을 맞아, 전쟁 시기의 그림들을 살펴볼게요.
전쟁의 불안한 분위기를 담다
〈작품 1〉을 보세요. 화가 장욱진(1917 ~1990)의 대표작 자화상입니다. 그가 당시 그린 자화상은 전쟁을 맞아 갈 곳 없어진 심경과 이상·현실의 괴리를 담은 것으로 해석되곤 하죠.
노랗게 물든 논길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어요. 검은 콧수염이 난 그는 검은 정장 차림에 검은 중절모자를 손에 들고, 검은 우산을 지팡이처럼 쥐고 있습니다.
6·25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습니다. 부산으로 피란 갔던 장욱진은 아내의 권유로 자신의 고향인 충남 연기군으로 향했습니다. 고향의 논둑길과 황금 벌판을 한참 걷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고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고향의 자연이 그를 반겨 포근하게 보듬어 주었으니까요.
장욱진은 풍경과 가축, 가족을 소재로 삶의 원형을 표현한 작품을 다수 남겼어요. 전쟁 중 그린 '나룻배' '자갈치 시장' 등 작품에도 마치 아이의 눈을 통해 본 듯 순수한 예술 세계를 담았어요.
〈작품 2〉는 박고석(1917~2002)이 그린 '범일동 풍경'입니다. 박고석은 산속에서 지내면서 산 풍경을 주로 그려 '산의 화가'로 알려져 있죠. '범일동 풍경'은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내려온 박고석이 한동안 머물던 동네를 그린 것입니다. 1951년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후퇴했고, 유엔군 또한 서울에서 철수하지요. 서울 주민 40% 이상이 피란했던 이 사건을 1·4 후퇴라고 부릅니다.
그림을 보세요. 굵고 투박한 검은 윤곽선과 갈색조의 어두침침하고 불안한 분위기로 해가 지는 거리를 표현했어요.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의 힘없고 침울한 발걸음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그들의 마음을 철길 부근의 거친 풍경으로 나타낸 그림이죠.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의 이야기
〈작품 3〉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2년에 완성된 이수억(1918~1990)의 '구두닦이 소년'입니다.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황량하게 변해버린 도시를 배경으로 홀로 서 있네요. 구두 통을 메고 구둣솔을 쥔 소년은 지쳐 보이고, 배가 고픈지 한 손으로는 배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부모의 보호 아래 아무 걱정 없이 지내야 할 어린 나이에,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된 것 같습니다.
6·25 전쟁 당시엔 많은 10대 청소년이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포화에 부모를 잃거나, 원하지 않게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상황도 숱했기 때문이죠.
일부 소년은 조금이라도 돈을 벌려고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을 구두를 닦아 광을 내준다는 뜻의 '슈샤인 보이(shoeshine boy)'라고 불렀어요. "구두 닦어"라고 외치며 돌아다녔을 그림 속 슈샤인 보이의 모습은 전쟁이 남긴 슬픈 장면입니다.
이수억은 6·25 전쟁 때 종군 화가(전쟁 중 군대를 따라 전쟁터를 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그리는 미술가들)로 활동했어요. 그는 전쟁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마치 신문에 실리는 보도사진처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작품 4〉는 임군홍(1912~1979) 화가가 가족과 헤어지기 전에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의 그림입니다. 탁자에 팔을 괴고 생각에 잠긴 딸과 그 옆에 아들을 안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내. 아내의 뱃속엔 곧 태어날 아이도 있었습니다. 집 안 곳곳에 도자기가 있고, 빨간 꽃신과 백합 한 송이가 보입니다.
임군홍은 해방 후 미술과 관련한 광고 디자인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받아 좌익 세력으로 낙인찍혔어요.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그가 북으로 간 것은 일단 몸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추정돼요. 그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한 듯 보입니다. 그 누구도 남북 분단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으니까요. 남편이 북으로 간 후 아내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자식들을 홀로 키웠다고 해요. 그러면서도 이 그림을 목숨처럼 지켰고, 팔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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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고석의 ‘범일동 풍경’(1951). 캔버스에 유채. 검은 계열 색을 통해 피란지 부산의 침울한 분위기를 나타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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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억의 ‘구두닦이 소년’(1952). 캔버스에 유채. 전쟁 통에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선 소년의 뒤편 왼쪽으로는 물건을 파는 소녀와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의 모습도 보여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청년의 초상’ 전시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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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군홍의 ‘가족’(1950). 캔버스에 유채. 그가 월북 전 남긴 마지막 작품이에요. /예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