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선교사가 세운 최초 근대 학교… 현대사 이끈 인물들 배출
입력 : 2025.05.29 03:30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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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 동관.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로 이전하기 전까지 교실이 있었던 건물이에요. 현재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배재학당
함께 입국한 아펜젤러·언더우드·스크랜턴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창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얻게 하소서!"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1885년 4월 5일, 조선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27세의 미국인 청년이 이렇게 기도했어요. 그는 기독교 감리회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Appenzeller·1858~1902)였습니다. 펜실베이니아주 사우더턴의 스위스·독일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뉴저지주 드루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조선 선교라는 임무를 맡게 됐습니다.
이는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돼 미국인의 조선 내 활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미국인은 장로회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 감리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이었습니다. 훗날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이화여대의 전신)을 설립하게 되죠. 그야말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7세 청년이 세운 '자유의 근대 교육기관'
잠시 일본으로 갔다가 그해 7월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 아펜젤러는 곧바로 교육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서울 정동 한 집의 방 2칸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고, 8월 3일 이겸라·고영필이라는 학생 두 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배재학당의 출범이었습니다.
2년 뒤인 1887년엔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현판을 달았습니다. 또한 미국 감리교회의 지원도 받게 됐습니다. 이 무렵 배재학당에는 학생 수백 명이 입학했다고 합니다. 1888년 초엔 르네상스 양식의 학교 건물이 완공되는 등 학교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한 아펜젤러는 '크고자 한다면 남을 섬겨라'라는 학당훈(學堂訓)을 만들었습니다. '큰 인물이 되려는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배재학당에 입학하려는 양반 자제 중에선 출세를 위해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의 출세보다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성경의 마태복음 20장 26~28절을 인용해 학당훈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배재학당의 설립 목적에 대해 아펜젤러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꾼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영어·수학 배우고 시·분 단위로 시간 따져
배재학당의 주요 과목은 영어·천문·지리·생리·수학·성경 등이었습니다. 기존 교육기관인 서당이나 향교에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던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근대 세계의 실체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주는 것들이었죠. 과외 활동으로는 연설회와 토론회를 통해 의견을 발표하는 훈련을 시킨 것이 주목됩니다. 정구·야구·축구 같은 근대 스포츠도 익히게 했어요. 한 학년을 두 학기로 나누고 입·퇴학 절차를 엄격히 규정했으며, 수업료를 현물 대신 돈으로 받는 등 학교 운영의 근대화도 이뤄졌습니다.
배재학당의 교육에서 또 하나 특별히 기억할 것이 있어요. 1890년 무렵 이 학당의 교칙을 보면 '등교 시간은 오전 8시 15분이며 점심은 11시 45분, 저녁 식사는 6시에 마친다'고 돼 있어요. 시(時)와 분(分) 단위로 시간을 따지는 것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배재학당의 교육은 '근대적 시간 관념'이 생겨나는 데도 일조했던 셈이죠.
아펜젤러의 활동은 배재학당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로 불리는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고, 언더우드 등과 함께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1902년 6월 전남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함께 배에 탄 여학생들을 구하려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안타깝게 순직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씨앗을 뿌리다
초창기 배재학당을 다녔던 인물들 중엔 역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이가 많습니다.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주시경(1876 ~1914),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의 중도좌파 정치인이었던 여운형(1886~1947),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1888 ~1957),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1902 ~1934) 등이 배재학당 출신 인물입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배재학당 출신 인물은 역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1875~1965)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시험에 낙방한 뒤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승만은 미국에서 돌아온 개화파 서재필이 1896년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하는 것을 듣고 그의 개화 사상과 계몽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이어 근대식 제도 도입, 정치 개혁과 입헌군주제(군주가 헌법에서 정한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는 정치 체제) 등을 주장한 협성회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협성회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승만은 서재필에게서 적극적 자유인 '프리덤(freedom)'의 개념을 배웠는데, 이는 훗날 그가 한국 역사상 첫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이 이름을 지어준 학교가 오히려 왕정(王政)이라는 앙시앵 레짐(옛 체제)을 극복하는 계기를 심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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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배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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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재학당의 교과서. ‘만국사’ ‘천문학’ 등 다양한 과목을 배웠어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배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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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이승만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서구의 자유·민주 사상과 영어를 배웠어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배재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