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조선시대 때도 조기교육 열풍… '족집게 강사' 있는 서당으로 몰렸죠
입력 : 2025.05.27 03:30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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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이철원
조선 시대에도 요즘 못지않은 조기 사교육 열풍이 있었습니다. 양반 남성으로 태어나면 대체로 열 살 때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하게 되는데, 교육의 목표는 당연히 과거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이었지요. 과거는 20~30년 동안 시험 준비에 매달려야 겨우 급제할까 말까 했어요. 그래서 조급한 부모들은 자식을 남들보다 더 빨리 가르치려고 안달했습니다. 겨우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상황이 왕에게 보고될 정도였습니다. 조기교육에 가장 열을 올리는 것은 바로 왕실이긴 했지만요.
그래서 조기교육은 정말 목적을 달성했을까요? 물론 정말로 똑똑한 '신동'이 있긴 했습니다. 세 살 때 옛 시를 인용해 시를 지은 율곡 이이, 네 살 때 한문책을 줄줄 읽었다던 서애 유성룡이 있었지요. 그 외에도 김시습, 이산해 등 무수한 신동들 역시 부모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진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옛 문집과 편지에서는 '공부 못하는 자식'에게 화를 낸 내용도 자주 등장합니다. 퇴계 이황이나 윤선도 같은 위인들도 자식들에게 공부 제대로 하라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입니다.
과거 아이의 교육은 집안 발전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양반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 시험 급제자를 반드시 배출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고려 말 문인 윤택은 어려서부터 어려운 한자를 읽고 능숙하게 글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본 그의 할아버지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지요. "우리 집안을 일으킬 것은 오직 너뿐이다."
조기교육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같은 공교육이 없었던 시절, 조선의 아이들이 집을 떠나 공부하러 간 곳은 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절의 승려들이었지요. 절보다 좀 더 본격적인 교육 기관은 일종의 '학원'인 서당입니다. 과거시험에 오래 도전했지만 급제하지 못한 '장수생'이나, 학문은 뛰어나도 신분 때문에 급제할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가르쳤지요. 성균관에서 하인 일을 하던 정학수가 연 서당엔 100명이 넘는 학생이 몰려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부만 잘 가르친다면 선생님의 신분쯤이야 아무 상관없다는 것이었지요.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된 사람들도 그 지역에서 서당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내 자식이 똑똑하길 바라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기대가 사랑을 앞서기 시작하면 부담이 되고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약 2500년 전 공자도 이런 경고를 남겼습니다. "빨리 이루려 하지 마라. 빨리 하려고 하면 도달하지 못한다(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