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부동산에 주식 도박까지… 100년 전에도 '영끌' 투자 있었죠

입력 : 2025.05.22 03:30

식민지 조선의 투기 열풍

1930년대 촬영된 함경북도 청진항 풍경. 길회선의 종단항으로 청진 대신 나진이 결정되자, 청진 주민들은 1932년 궐기 대회를 열었어요. /위키피디아
1930년대 촬영된 함경북도 청진항 풍경. 길회선의 종단항으로 청진 대신 나진이 결정되자, 청진 주민들은 1932년 궐기 대회를 열었어요. /위키피디아
지난 2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올해 1분기 가계 신용 잔액이 1928조7000억원으로 나타났어요. 가계 신용이란 개인이 빌린 대출 금액에 결제 전 카드 사용 금액을 더한 '포괄적 가계 부채'로, 이번이 역대 최고 기록이라고 해요. 이른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부동산 투자'를 위한 대출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의식주를 포함한 물가가 크게 오르고 살기가 점점 팍팍해지는 환경에서, 당장 많은 돈을 빌려서라도 미래의 수익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죠. 주식과 비트코인으로 향하는 관심도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최근에서야 시작된 현상이 아닙니다. 한국인이 처음 자본주의와 마주했던 한 세기 전에도 돈을 벌기 위한 열풍은 대단했습니다.

'시골 항구'를 둘러싼 투기 열풍

1932년 8월 25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주민 700여 명이 궐기 대회를 위해 모였습니다. 이들은 비장한 열변을 토하고 서울에 사람을 보내 항의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거리는 온통 눈물바다였고 초상집처럼 숙연했다고 합니다. 총독부마저 이 분위기에 겁을 먹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독립운동이나 만세 운동이었을까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염두에 두고 만주 지린(吉林)과 함북 회령을 잇는 철도인 '길회선'을 계획했습니다. 여기서 길회선의 종단항(종착역이 닿는 항구)이 어디가 되느냐가 중요했는데,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오가는 물자가 반드시 그곳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런 기대를 했던 겁니다. '대륙과 일본을 잇는 국제 항구가 될 테니 돈벼락이 쏟아질 게다!'

일제 당국은 1925년부터 청진, 나진, 웅기를 종단항 후보로 올리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뜻밖에도 인구 100여 명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나진을 종단항으로 결정했습니다. 청진 주민들이 '종단항을 되찾자'며 궐기 대회를 연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습니다. 돈 앞에선 조선인·일본인, 민관 구분 없이 일치단결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진과 인근 웅기는 부동산 투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땅값은 넉 달 만에 1000배 가까이 올랐고, 아시아 여러 곳에서 몰려온 브로커와 투기꾼들이 거리를 메웠습니다. "웅기에 가면 개도 100원(당시 월급쟁이 두 달 치 봉급)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나진의 토지 450만 평을 미리 사들여 1200만원의 수익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일제 당국이 나진의 토지를 '종단항 발표 이전 가격'으로 수용하겠다고 발표하자 부동산 열풍은 싸늘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럭키경성'을 쓴 전봉관 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는 "나진의 종단항 결정을 둘러싼 사건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었던 집단적 땅 투기 열풍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소외당한 식민지 조선인이, 처음 맛본 자본주의의 '돈맛' 앞에서 커다란 열망을 품었던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백만장자를 꿈꾼 투기꾼 청년의 추락

당시 조선 사람들은 부동산과 주식, 금광뿐 아니라 정어리나 미두(米豆)처럼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투기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미두'는 당장 현물 없이 약속만으로 쌀을 거래하는 것으로, 요즘 선물(先物) 거래와 비슷한데 대단히 투기성이 강했습니다. 하루에 한 사람이 현재 가치 1억~2억원을 따거나 잃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인천의 미두 시장에서 큰돈을 번 '스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중매점 하인 출신인 스물한 살 청년 반복창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이를 악물고 모은 400~500원을 밑천 삼아 미두꾼으로 나섰고, 1920년 쌀값이 갑자기 치솟은 타이밍을 타고 하루아침에 백만장자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반복창에게는 '미두의 신(神)'이란 별명까지 붙었죠.

반복창은 인천에 마련한 400평 집터에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저택'을 지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21년 조선호텔에서 치른 결혼식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신부가 장안에 소문난 미모의 신여성이었는 데다, 현재 가치 30억원의 비용을 들이고 하객을 위해 서울 시내 자동차 3분의 1을 동원한 초호화판 결혼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 뒤 반복창은 번번이 시세 예측에 실패해 파산했고, 사기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혼 뒤 서른 살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지팡이를 짚고 매일 미두 시장 근처를 돌아다니며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쌀값이 오른다… 쌀값이 떨어진다."

"일확천금을 하려거든 사람 노릇 포기하라"

식민지 조선의 주식시장에는 지금은 자취를 감춘 '합백(合百)'이란 것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합백이란 사설(私設) 증권 거래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주가의 등락을 놓고 벌이는 도박이었습니다. 주식시장이 있던 서울 명치정(지금의 을지로 2가와 명동 일대)이 주 무대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돈 가진 사람들이 합류하기 시작해 10~20원 하던 합백판의 단위가 만 원대까지 치솟았다고 합니다.

합백꾼이 주식시장 근처 도로에 가득 차서 행인의 통행까지 어려워지자 경찰은 명치정 곳곳에 "거리에 서 있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였다고 합니다. 합백꾼 출신으로 증권회사 사장까지 된 김귀현이라는 신화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일본군이 장고봉에서 소련군과 충돌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일 전쟁'이 일어나리라 잘못 예측한 결과 재산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부자가 된 지 3년 만에 다시 빈털터리가 됐던 것이죠.

당시에 이미 식자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적은 밑천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꾸려거든 사람 노릇을 포기하고,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땀과 수고의 결과로 얻은 돈이 아니라 너무 쉽게 얻은 돈은 마찬가지로 쉽게 잃을 수 있는 데다 패가망신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거죠. 이 진리는 100년 후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입니다.
쌀 선물 거래가 이뤄졌던 인천 미두취인소 풍경. 지금의 증권시장과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인천광역시
쌀 선물 거래가 이뤄졌던 인천 미두취인소 풍경. 지금의 증권시장과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인천광역시
경성 명치정(현 명동)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 주식거래소 경성주식현물취인소. 주가를 놓고 도박을 벌이는 합백꾼들은 주식 시장이 있는 명치정으로 몰려들었어요. /한국거래소 자본시장역사박물관
경성 명치정(현 명동)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 주식거래소 경성주식현물취인소. 주가를 놓고 도박을 벌이는 합백꾼들은 주식 시장이 있는 명치정으로 몰려들었어요. /한국거래소 자본시장역사박물관
1925년 6월 11일 조선일보 연재 만화 '멍텅구리'의 일부. 주인공 최멍텅이 인천에 가서 미두시장에 뛰어들었다 낭패당하는 이야기를 그렸어요. 미두취인소를 알게 된 최멍텅이
1925년 6월 11일 조선일보 연재 만화 '멍텅구리'의 일부. 주인공 최멍텅이 인천에 가서 미두시장에 뛰어들었다 낭패당하는 이야기를 그렸어요. 미두취인소를 알게 된 최멍텅이 "옳지 돈 벌 일이 났다(생겼다)"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조선일보DB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