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日에 지식 전파한 외교사절단… 우리나라엔 고구마 들여왔죠

입력 : 2025.05.15 04:25

조선통신사

일본 화가 하네카와 도에이가 1748년 일본 에도(현 도쿄)를 방문한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그림. 에도 백성들이 마치 축제를 즐기듯 행렬을 구경하고 있어요. /서울역사박물관
일본 화가 하네카와 도에이가 1748년 일본 에도(현 도쿄)를 방문한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그림. 에도 백성들이 마치 축제를 즐기듯 행렬을 구경하고 있어요. /서울역사박물관
최근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해 '조선통신사' 관련 행사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어요. 문체부는 서울 경희궁에서 출발해 도쿄로 이어지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선 조선통신사 특별전을 진행 중이죠.

조선이 일본에 보낸 조선통신사는 단순한 외교사절단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국제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 양국의 문화와 지식을 교류하는 역할을 했죠. 오늘은 조선통신사를 중심으로 한일 교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을 통하는 사절단'이라는 의미

조선통신사는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이 일본에 보낸 공식 외교사절단이에요. 조선은 건국 초부터 '통신사(通信使)'라는 이름의 사절단을 여러 차례 일본으로 보냈죠. 통신사의 한자를 풀어 보면, '믿음을 통하는 사절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두 나라의 평화와 신뢰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조선 국토는 황폐화됐고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죠.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을 믿지 않았어요. 전쟁 이후에도 일본에 대한 높은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단절된 국교를 재개하려고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일본에서 에도막부(1603~1867)가 수립되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은 선진 제도와 문화, 지식을 갖고 있는 '문명국'으로 여겨졌어요. 또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도 얻고 있었죠. 따라서 에도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관계 회복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했던 거예요. 조선은 처음에는 이 요구에 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오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결국 사절단을 다시 파견하게 됩니다.

사절단이 다시 일본으로 향한 것은 1607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절단에는 '통신사'라는 이름 대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이 붙여져요. 일본 측 요청에 '회답'함과 동시에 조선인 포로를 데려올(쇄환) 목적으로 파견된 사절단이라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총 12차례 공식 사절단이 일본으로 파견되지요. '통신사'라는 명칭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1636년 4차 사절단이 파견되면서부터였어요. 일본은 주로 쇼군(막부 최고 권력자)이 바뀔 때마다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지요. 파견과 접대 비용은 일본에서 부담했는데, 이는 막부의 1년 예산과 비슷한 정도였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막부는 통신사가 조선 국왕의 국서를 쇼군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공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막부의 권위와 위상을 보여주려 했어요.

문화 공연 같았던 통신사 행렬

통신사의 편성과 인원은 매번 조금씩 달라졌지만, 300~500명 정도로 구성됐어요. 여기엔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 문서를 담당하는 제술관, 그림을 담당하는 화원이 동행했습니다. 또 곡예 등을 담당하는 인원도 있었어요. 당시 일본 사람들은 조선통신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조선통신사의 방일 풍경은 일본 측에서 그린 '조선통신사래조도'에 잘 나타나 있어요. 에도(현 도쿄)에 입성한 통신사 행렬이 나타나 있는데요. 행렬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2층 상가 건물들은 당시 에도의 번화가를 나타내지요. 전통 조선 복식을 입은 사절단이 시내로 행진하는 가운데, 주위엔 수많은 일본 백성이 사절단을 구경하고 있어요. 통신사 행렬은 수십 년 만에 한 번 오기 때문에 이 구경을 놓치지 않고 싶어 했던 것이죠.

당시 통신사 일행의 왕복 여정엔 6~11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먼저 한양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만 1~2개월 정도가 걸렸어요. 그 뒤엔 배를 이용해 쓰시마(현 대마도)와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로 이동했죠. 오사카부터는 다시 육로로 이동했습니다. 교토와 나고야를 거쳐 에도에 도착한 사절은 조선 국왕의 국서와 선물 등을 쇼군에게 전달했고, 쇼군에게도 국서와 선물을 받아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어요.

당시 일본엔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 네덜란드인이 통신사 행렬을 보고 남긴 기록이 있어요. 행렬의 전체 길이는 3~4㎞ 정도에, 통신사를 안내하고 이들의 짐을 나르는 데 일본인 수천 명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한일 문물 교류에도 기여

통신사는 양국 사이 문화와 문물 교류에도 크게 기여했어요. 우선 통신사 행렬은 그 자체로 대규모 문화 공연이었어요. 행렬 앞에선 조선 악대가 연주를 했고, 말 위에서 펼치는 곡예 공연도 이뤄졌어요. 통신사 일행은 각 지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일본 문인들과 소통하며 교류했어요. 언어는 달랐지만, 양국 다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필담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죠. 통신사가 남긴 흔적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일본 시즈오카현에 있는 사찰 '세이켄지'엔 1643년 조선통신사 일행이었던 박안기가 남긴 '경요세계(瓊瑤世界)'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선 조선인의 글씨가 인기 있었다고 해요.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것도 있어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구마입니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조엄은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처음 목격했어요. 그가 남긴 '해사일기'엔 고구마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생김새가 무 뿌리와 같으며 오이와도 같다. 이것은 날것으로 먹을 수 있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고, 삶아서도 먹을 수 있다. 가히 흉년을 지낼 수 있는 좋은 물건이다." 조엄은 고구마 종자를 부산으로 보냈고, 이후 고구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구황작물이 됐습니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말 위에서 일본인이 건넨 종이에 글을 써주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서울역사박물관
조선통신사 일행이 말 위에서 일본인이 건넨 종이에 글을 써주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서울역사박물관

김성진 서울 상암고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