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잔치·씨름·장터… 민중의 삶 담은 그림, 대표 회화 양식 됐죠

입력 : 2025.05.14 09:58

동아시아 전통 회화

고판화박물관이 공개한 ‘취주귀비도’(18세기 중·후반 추정). 술에 취한 양귀비(가운데)가 궁녀들의 부축을 받고 있어요. /고판화박물관
고판화박물관이 공개한 ‘취주귀비도’(18세기 중·후반 추정). 술에 취한 양귀비(가운데)가 궁녀들의 부축을 받고 있어요. /고판화박물관
최근 강원도 원주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에서 '취주귀비도'를 공개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취주귀비도는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양귀비를 그린 그림으로, 현종이 밤늦도록 처소(處所)에 돌아오지 않자 화가 난 양귀비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청나라 시대 민간에서 제작한 연화(年畫)의 일종입니다. 연화는 음력 정초에 집 안이나 대문에 걸어 한 해의 복을 기원하던 풍속화예요. 역사적 인물이나 민간 설화를 주로 소재로 삼았는데, 중국의 대표 미인으로 여겨지는 양귀비는 연화의 단골 소재였죠.

이번에 공개된 작품은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재위 1735~1796) 시기 그려진 것으로 추정돼요. 이런 연화는 궁중 화가가 아닌 민간 장인들이 그렸어요. 명·청 시기 농업 생산력과 상업이 눈에 띄게 성장하면서 서민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지요. 같은 시기 한국과 일본에서도 서민 중심의 회화 양식이 발달했어요. 오늘은 한·중·일의 전통 회화를 알아보겠습니다.

명·청 시기부터 널리 퍼져

중국에서는 설 명절이 되면 대문이나 창문, 실내 곳곳을 연화로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어요. 연화는 나쁜 기운을 쫓고 좋은 운을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죠. 연화의 역사는 매우 길지만,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고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후기부터였습니다. 판화 인쇄 기술이 발달하며 전국 곳곳으로 퍼졌던 것이죠. 연화는 굵고 단순한 선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연화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주제는 '신상(神像)'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한 해의 평안과 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신들을 그려 집 안 벽 등에 걸었던 거예요. 시간이 지나며 내용은 다양해졌습니다. 자손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에 따라 다복(多福)과 번창을 상징하는 어린아이를 그린 그림도 유행했습니다. 연화는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서사 구조를 가진 그림이었습니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서민층의 염원을 담아 '등용문' 고사를 바탕으로 한 그림도 많았습니다. 등용문은 잉어가 용이 된다는 전설이지요. '삼국지'의 영웅들이나 가무(歌舞) 장면 등도 주요 소재였어요. 청나라 말에는 아편전쟁이나 의화단운동, 신해혁명 등 격동하는 시대 상황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기존 정통 회화에선 보기 힘들었던 직설적이고 자유로운 표현 양식으로 나타났지요. 정확한 비례나 원근감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 더 중시됐던 거예요.

한국에선 풍속화·민화 등장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 그림에서도 서민 문화의 발달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풍속화와 민화가 대표적이지요.

풍속화는 말 그대로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풍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잔치, 씨름, 장터 풍경처럼 평범한 민중의 삶이 주된 소재였고,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궁중 화가들이 활약하며 조선 후기 회화의 한 축을 형성했죠.

반면 민화는 전문 화가가 아닌 무명 화공이나 민간 장인들이 그린 그림이에요. 일정한 화법이나 격식보단 서민의 기호와 소망이 반영된 그림입니다. 연화와 마찬가지로 가정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고 불행을 물리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민화는 초기엔 서울에 사는 재력 있는 중인 계층이 소비했지만, 점차 더 다양한 계층이 즐기게 됐어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까치와 잡귀를 물리치는 호랑이,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번창을 의미하는 물고기(주로 잉어)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죠. 이 그림들은 집 안에 걸어 두거나 혼례 등 행사에 활용됐습니다. 판화로 대량 복제된 연화와 달리, 민화는 대체로 붓으로 그렸어요.

조선 후기에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사회 구조의 변화가 있습니다.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동요했고, 여기에 농업과 상업의 발전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농민과 상인 계층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로 떠오르며 그림에 대한 수요 역시 증가한 것이지요.

유럽 회화에도 영향 준 우키요에

에도 시대(1603~1867) 일본에선 '우키요에(浮世絵)'라는 독자적인 회화 양식이 발달했습니다. 우키요에는 에도(현 도쿄)의 유흥가를 배경으로 게이샤(기생)나 일본 전통 공연인 '가부키'의 배우 등 당대 인기 인물들을 그린 목판 그림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인기 배우의 화보 같은 것이죠.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 중·후반기에 경제 성장과 교통망 정비가 이뤄지며 대중화됩니다. 우키요에는 화가가 밑그림을 그린 뒤 목판 장인과 인쇄 장인이 분업해 제작했습니다.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덕분에 그림 한 장당 가격도 우동 한 그릇 정도로 저렴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상업과 도로망이 발달하며 지역 간 왕래가 잦아지자 전국의 명소와 자연 풍경을 소재로 한 그림들도 등장했죠.

이런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가쓰시카 호쿠사이입니다. 그는 '후지 삼십육경'으로 큰 명성을 얻었는데, 그중에서도 거대한 파도와 후지산이 함께 그려진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는 일본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해요.

우키요에는 19세기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끼쳤어요. 현란한 색조와 비대칭적 구도, 단순화된 윤곽선 등의 화풍뿐 아니라 우키요에에 그려진 일본 사람들의 일상도 유럽인들에겐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다수의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모사한 것으로 유명해요. 고흐는 '탕기 영감'이라는 초상화 배경에 우키요에 작품을 상당히 많이 그려 넣기도 했어요.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작품 ‘씨름’(18세기 후반 추정). 민중의 삶을 그린 풍속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가운데 두 씨름꾼 주위로 구경꾼들이 앉아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작품 ‘씨름’(18세기 후반 추정). 민중의 삶을 그린 풍속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가운데 두 씨름꾼 주위로 구경꾼들이 앉아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우키요에 대표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9세기). 배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센 파도가 치는 가운데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이 보입니다. /미 의회도서관
일본 우키요에 대표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9세기). 배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센 파도가 치는 가운데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이 보입니다. /미 의회도서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1887~1888 추정). 예술 후원가인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의 초상 뒤로 우키요에가 여러 점 그려져 있어요. /로댕박물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1887~1888 추정). 예술 후원가인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의 초상 뒤로 우키요에가 여러 점 그려져 있어요. /로댕박물관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