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삼권분립 위해 대통령과도 싸웠죠

입력 : 2025.05.08 03:30 | 수정 : 2025.05.08 03:34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그는 대법원장을 지내며 우리나라의 사법 체계가 자리 잡는 데 큰 공헌을 했어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그는 대법원장을 지내며 우리나라의 사법 체계가 자리 잡는 데 큰 공헌을 했어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지난 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급심에서 온 판결문을 깨뜨리고 다시 판결하라고 돌려보내는 일)했어요. 그러자 야당에선 "대통령도 두 번이나 탄핵했는데 대법원장이 뭐라고"라며 조희대 대법원장을 탄핵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럼 대법원장은 과연 뭘까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1887 ~1964)를 통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그의 호 '가인'은 '길거리 사람'이란 뜻인데, 망국의 시절 갈 곳을 잃어버린 자신과 조국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지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민권 변호사'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김병로는 유년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됐어요. 전통 성리학 교육을 받은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18세 나이에 최익현의 의병 부대에 들어가 활동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년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배우는 게 먼저인 법. 23세 때인 1910년,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한 차례 폐결핵으로 중도에 귀국하기도 했으나, 결국 메이지대 법학부와 주오대 고등연구과(대학원 과정)를 졸업하고 1914년 귀국했습니다.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던 김병로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변호사 개업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수많은 독립운동 사건을 무료 변론했습니다. 그는 당시 법정에서 '유조리 최열렬(有條理最熱烈)'이란 평을 들었는데요. 변론이 조리가 있고 매우 열렬하다는 말이었습니다. "피고인들이 마음에 독립을 품었다는 이유로 처벌하려 한다면 조선인 전체를 처벌해야 할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민족 변호사' '민권 변호사'라는 말을 듣던 김병로는 1923년 형사공동연구회를 설립했는데, 겉으로는 법률 연구 단체였으나 사실은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 전선을 만들어 '독립운동은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 단체로서, 독립투사 변론뿐 아니라 그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습니다.

김병로는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김상옥 의사 사건, 광주학생 항일운동, 6·10 만세 운동에 이르는 여러 독립운동 사건에서 변호사로 활약했죠. 1927년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되고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 13년 동안 농촌에 은둔했습니다.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았고, 태평양전쟁 기간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랜 은둔 끝에 초대 대법원장으로

그가 오랜 은둔을 끝낸 것은 꿈에도 그리던 1945년 해방 직후였습니다.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정치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죠. 한때 김규식·여운형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에 몸담았으나, 미소공동위원회의 해체 이후 분단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대법원장에 임명해 9월 13일에 취임했습니다.

대법원장은 대한민국 대법원의 수장으로, 대법원을 대표하고 법원의 행정사무를 감독하는 직책입니다. 권력 분립 원칙에 따른 대한민국의 3부 요인 중에서 헌법재판소장과 함께 대한민국 사법부를 공동으로 대표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1988년 출범했기 때문에 정부 수립 당시는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유일한 대표였습니다.

사법부는 행정부(정부), 입법부(국회)와 함께 권력 분립, 즉 '삼권분립'의 세 권력 중 하나를 말합니다. 삼권분립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을 셋으로 나누고, 그 나눠진 일을 독립한 세 기관이 각각 맡게 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권력의 남용을 방지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것으로, 17세기 영국 존 로크(행정·입법 분립)와 18세기 프랑스 몽테스키외(행정·입법·사법 분립) 등 근세 유럽의 대표적인 정치 사상가들로까지 뿌리가 올라갑니다.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주창한 이유는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는 삼권분립이 불가능한 체제는 오직 공포로 유지되는 전제정(專制政)뿐이라고 했습니다.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위해 힘쓰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아직 생소했을 삼권분립과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와 대립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자 김 대법원장이 했다는 말은 유명합니다.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사람들은 '아, 대통령이라 해도 사법부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하는구나, 이게 바로 민주주의 국가의 삼권분립이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1952년 5~7월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전까지 일련의 정치적 소요 사건인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 직후엔 대법관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 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

그러나 그가 항상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국가 정책이 올바르다고 판단될 때는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를 우리 영토로 분명히 포함하는 '평화선'을 선포해 영해의 광물과 수산 자원을 보호하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뒤 김병로 대법원장은 "평화선은 국제법상 정당하며, 일본 어선의 침범은 양국 간의 충돌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일본 측에 경고했습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1957년 12월까지 9년 3개월의 재임 기간 소신 있고 강직한 공인(公人)으로서의 자세를 꿋꿋이 지켰습니다. 6·25 전쟁 때 부상을 당해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도 의족을 짚고 출근할 정도였습니다. 법관의 청렴을 늘 강조했던 그는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돼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1957년 4월 전국 사법감독관회의에서 훈시하는 김병로(가운데) 대법원장. 이 자리에서 “법관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했대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1957년 4월 전국 사법감독관회의에서 훈시하는 김병로(가운데) 대법원장. 이 자리에서 “법관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했대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1957년 12월 자신의 퇴임식에서 발언하는 김병로(태극기 앞) 대법원장. 그는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라는 퇴임사를 남겼대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1957년 12월 자신의 퇴임식에서 발언하는 김병로(태극기 앞) 대법원장. 그는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라는 퇴임사를 남겼대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이승만(왼쪽) 대통령과 퇴임한 김병로 대법원장. 두 사람은 사법부 독립과 권력 분립을 둘러싸고 대립했지만, 국가 이익을 두고 협력하기도 했어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이승만(왼쪽) 대통령과 퇴임한 김병로 대법원장. 두 사람은 사법부 독립과 권력 분립을 둘러싸고 대립했지만, 국가 이익을 두고 협력하기도 했어요. /대법원·e영상역사관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