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그리스도의 대리인' 교황… 예수와 베드로 관계서 비롯됐죠
입력 : 2025.05.07 03:30
| 수정 : 2025.05.07 04:11
역사 속 교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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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세기 말 그려진 그림으로, 앞줄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열쇠를 받고 있는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가톨릭에서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여깁니다. 교황 제도의 시작은 예수와 사도 베드로의 관계에서 비롯됐습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하며, 그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로 꼽히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지요.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로마를 관할하는 주교들은 자신을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기며 그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요. 따라서 최초의 교황은 베드로로 간주됩니다.
5세기 중반, 교황 레오 1세는 "오직 베드로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후 로마 주교(교황)는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답니다.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당시 교황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왕이나 황제 못지않은 세속 권력을 행사했죠. 대표적인 인물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였어요.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교황령에 대한 직접 통치를 강화하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왕들을 파문하면서 교황의 강력한 권위를 드러냈죠. 자신의 뜻을 거부한 유럽의 왕들을 파문해 교황의 뜻에 따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의 사상은 "영혼을 다스리는 권력은 육체를 다스리는 권력보다 더 높다"라는 말로 요약되지요.
세속 권력과 부의 확대에 치중한 교황도 있었어요. 대표적 인물이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 1294~1303)입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자신의 친인척을 요직에 임명해 가문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비판을 받았지요. 당대 사람들도 이 상황이 너무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자신의 대표작 '신곡'에서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지옥에 떨어질 인물'로 묘사했지요.
그는 강력한 교황권을 주장하며 당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대립했어요. 13세기 말 필리프 4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걷으려고 했는데, 이에 교황은 성직자에게 과세할 수 없다며 반발했죠. 이에 격분한 필리프 4세는 교황궁에 군대를 보내 사임을 압박합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은 뺨을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치욕을 당한 교황은 결국 한 달 후에 선종하죠.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는 '사상 최악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는 성직자임에도 여러 자식을 두었는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모델로 삼을 만큼 뛰어난 전략가이자 냉혹한 권력자로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도 그의 아들입니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 추기경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렸다는 의혹도 있었지요. 교황직이 사적인 권력과 돈으로 얼룩지면서 교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이는 훗날 종교개혁의 불씨가 됩니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예요. 경복궁 면적의 약 1.3배 크기인 0.44㎢에 불과하지만, 10억명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중심지랍니다.
그런데 바티칸이 처음부터 독립국이었던 것은 아니에요. 과거엔 '교황령'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이탈리아 중부를 중심으로 1000년 넘게 존재했어요. 이곳은 교황이 직접 다스리는 땅이었고, 특히 8세기 말에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을 후원하면서, 교황령의 권리와 영향력 또한 확대됐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와 통일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19세기에는 이탈리아도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됩니다. 그 과정에서 중부에 있는 교황령은 정치·지리적 장애물로 여겨졌죠.
1870년엔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며 결국 교황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당시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 정부와 대화를 거부하고 교황권의 독립성을 주장했지요.
약 60년 동안 이어진 이 갈등은 1929년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의 수상 무솔리니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며 해결됩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는 바티칸의 독립을 인정하고, 바티칸 안에서 교황의 주권을 보장했지요.
교황은 근대 이후 세속적인 권력자로서 권력은 줄어들었지만, 현대 국제 정세에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1978년 교황 자리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역사상 첫 폴란드 출신 교황이자 400여 년 만에 등장한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었어요. 그는 공산 정권 치하에서 자란 인물로,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그가 교황에 오른 뒤 조국 폴란드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졌고, 교황은 이를 공개 지지하며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변화를 촉진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냉전 말기 여러 유럽 국가의 민주화 흐름 속에서 도덕적 지도자로서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총격을 당한 교황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81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군중을 맞이하던 그는 갑자기 총성과 함께 쓰러졌죠. 튀르키예 국적의 청년이 쏜 총알 두 발이 몸을 관통한 거예요.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교황은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이후 세상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교황이 자신을 저격한 감옥에 있는 청년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 겁니다. 저격 이유와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교황은 그에게 "용서한다"고 말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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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그린 그림. 그는 중세 시기 가장 강력한 교황 중 한 명으로 꼽혔어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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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보낸 군대에 의해 뺨을 맞았다고 전해지는데, 그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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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총격을 당한 후 부축을 받고 있어요. 교황은 자신을 쏜 청년을 찾아가 용서하지요.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