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어제의 숙적이 오늘의 동지… 공통의 적 나타나면 뭉쳤죠

입력 : 2025.04.30 03:30

앙숙 동맹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왼쪽)와 오스만 제국 황제 술레이만 1세(오른쪽)의 초상화를 편집한 사진. 두 사람이 체결한 프랑스·오스만 동맹으로 양국은 군사·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위키피디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왼쪽)와 오스만 제국 황제 술레이만 1세(오른쪽)의 초상화를 편집한 사진. 두 사람이 체결한 프랑스·오스만 동맹으로 양국은 군사·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위키피디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강도 관세 정책으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간 경제와 안보, 인권 등을 두고 대립해 온 유럽 국가들과 중국 사이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건데요.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과 EU(유럽연합)가 미국의 괴롭힘을 함께 막아내야 한다"고 말했어요. EU 역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고요. 오는 7월엔 중국과 유럽연합이 정상회담도 가질 예정이랍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대립해 온 국가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손을 맞잡는 일은 세계사에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공통의 적 앞에선 오랜 적대 관계를 뒤로하고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우는 혈맹이 된 경우도 많았죠. 오늘은 역사 속의 '앙숙 동맹'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슬람 제국과 동맹 맺은 기독교 국가

16세기 초 서유럽의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는 스위스에서 출발한 귀족 가문으로,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과 헝가리, 네덜란드 등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어요. 카를 5세 시기엔 권세가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스페인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등을 겸임했지요.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꼈고, 1525년엔 카를 5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세력과 싸우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겪습니다. 굴욕을 당한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에 맞설 강력한 동맹을 찾았죠. 그리고 그가 손을 내민 나라는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뒤 발칸 반도를 빠르게 정복하며 유럽을 위협했죠. 이런 상황에서 프랑수아 1세가 오스만 제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겁니다.

유럽 진출을 구상하고 있었던 술레이만 역시 프랑스의 제안을 반겼습니다. 결국 양국은 1536년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어요.

프랑스·오스만 동맹은 이탈리아 전쟁(1494~1559)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독일·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벌인 전쟁이었는데요.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프랑스를 지원해 1543년 니스를 포위했어요. 전쟁 중 오스만 함대는 프랑스의 항구도시 툴롱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기독교 국가가 이슬람 국가의 군대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어요. 오스만 제국은 이 동맹을 통해 지중해 서부까지 영향력을 넓혔어요.

양국은 약 260년 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했어요. 1798년 나폴레옹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이집트를 침공하며 동맹이 깨지게 됩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의 적이었던 영국과 연합하죠.

'숙적' 프랑스와 영국, 같은 편 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 후반까지 오랜 시간 동안 '숙적'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중세 시대부터 수차례 전쟁을 벌였지요. 대표적으로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100년 넘게 이어진 백년전쟁(1337~1453)은 양국 간 깊은 적대감을 남겼어요.

19세기 들어서도 양국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식민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무력 충돌 직전까지 치닫기도 했었죠.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의 세력 구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독일이 급속히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이죠. 독일은 해군력을 키우며 영국을 위협했고 대륙에서는 프랑스와의 국경에서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이에 오랜 적대 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을 모색하게 됩니다. 1904년 양국은 '영불 협상'을 체결해 식민지 갈등을 해소했습니다. 영국은 이집트에 대해,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권리를 갖기로 한 거죠.

곧이어 러시아도 이 흐름에 합류했습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1904~1905)에서 패배한 뒤 외교적 고립을 우려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할 새로운 동맹을 원했어요. 이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는 1907년 '영러 협상'을 맺어 페르시아,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에서의 활동을 조정하고 갈등을 정리했어요. 이로써 프랑스·영국·러시아 세 나라가 연결되면서 '삼국 협상'이 탄생했답니다. 삼국 협상의 출발은 공식적인 군사동맹은 아니었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로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념보다 이해관계가 우선

이해관계에 따라 아주 일시적인 동맹이 맺어진 경우도 있어요. 20세기 나치 독일과 소련은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적대 관계였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는 공산주의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고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어요. 스탈린의 소련 또한 나치와 파시즘을 부정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1939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벌어집니다. 서로를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한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이 조약 이면에는 비밀리에 체결된 의정서가 있었어요. 이 의정서에서 독일과 소련은 동유럽을 서로 나누기로 합의했고 특히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소련도 2주 뒤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어요. 양국의 침공에 폴란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지요. 그러나 이 '앙숙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독소불가침조약은 히틀러가 프랑스 방향의 '서부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맺은 일시적 합의였기 때문이죠.

히틀러는 2년 후 이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연합국 편에 서서 독일과 치열한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국가 간 동맹에는 이념이나 원칙보다 눈앞의 이해관계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904년 맺어진 ‘영불 협상’을 풍자한 삽화. 중년 남성으로 의인화된 영국(가운데)이 프랑스(맨 오른쪽 여성)와 함께 떠나는데, 독일(맨 왼쪽 남성)은 신경 쓰지 않는 척 등을 돌리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1904년 맺어진 ‘영불 협상’을 풍자한 삽화. 중년 남성으로 의인화된 영국(가운데)이 프랑스(맨 오른쪽 여성)와 함께 떠나는데, 독일(맨 왼쪽 남성)은 신경 쓰지 않는 척 등을 돌리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제작된 삼국 협상 포스터. 왼쪽부터 프랑스, 러시아,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에요. /위키피디아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제작된 삼국 협상 포스터. 왼쪽부터 프랑스, 러시아,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에요. /위키피디아
1939년 8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왼쪽)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1939년 8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왼쪽)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