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번영 속 가난의 시대… 지킬과 도리안, 인간 이중성 그렸죠

입력 : 2025.04.21 04:33

지킬 앤 하이드·도리안 그레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지킬(배우 홍광호)이 자기 팔에 주사할 빨간 약물을 보고 있어요. 지킬 박사는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하려고 하죠. /오디컴퍼니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지킬(배우 홍광호)이 자기 팔에 주사할 빨간 약물을 보고 있어요. 지킬 박사는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하려고 하죠. /오디컴퍼니
인간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젊음과 늙음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많은 작가가 이런 '인간의 이중성'을 주제로 흥미로운 작품들을 써왔지요.

모험 소설 '보물섬'으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은 1886년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주제로 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을 발표합니다. 우리에게 '지킬 앤 하이드'로 잘 알려진 작품이지요.

비슷한 시기, 인간의 이중성을 주제로 한 또 다른 소설이 발표됩니다. 1890년 아일랜드 출신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입니다. 최근에 이 두 작품은 국내에서 연극과 뮤지컬로 공연되고 있는데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5월 18일까지·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와 연극 '지킬 앤 하이드'(5월 6일까지·대학로 티오엠), 그리고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6월 8일까지·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입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작품은 어떻게 인간의 이중성을 묘사하고 있을까요.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다루다

소설 '지킬 앤 하이드' 주인공 헨리 지킬은 유능한 의사이자 과학자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누구나 마음속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믿으며, 두 성향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아내려고 하죠.

지킬 박사는 여러 차례 연구 끝에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하는 약물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약물을 자신의 몸에 주입해 내면에 존재하는 악한 인격, '하이드'로 변신합니다. 하이드는 지킬 내면에 잠재돼 있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욕망 그 자체입니다.

지킬은 낮에는 점잖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살다가, 밤이 되면 하이드로 변신해 도시를 배회하며 범죄를 저지릅니다. 처음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지킬은 점점 하이드의 폭력성에 잠식되고, 결국 하이드가 지킬의 삶을 점차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지요. 지킬은 더 이상 내면의 악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이드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택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선과 악이 명확히 나뉘지 않고 뒤엉켜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극 중 서사를 만들어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2004년 국내 초연 이후 작년 20주년을 맞은 장수 인기 작품입니다. 그동안 조승우, 홍광호, 박은태, 최재림 등 실력 있는 뮤지컬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아왔지요. 특히 뮤지컬 넘버(노래) '지금 이 순간'은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쓰일 정도로 대중적인 노래가 됐어요. 미국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한 데 비해, 한국에선 올해까지 누적 200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200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캣츠' '맘마미아''명성황후''지킬 앤 하이드' 네 작품뿐입니다.

반면 연극 '지킬 앤 하이드'는 원작을 충실하게 무대화한 작품입니다. 뮤지컬이 지킬과 하이드의 감정을 중심으로 구성했다면, 연극은 추리극의 형식을 그대로 살려 지킬 박사의 친구 존 어터슨이 하이드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죠. 이 작품에서 주목할 부분은 단연 '1인 8역'으로 극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배우 한 명이 어터슨은 물론 지킬, 하이드, 다른 등장인물들까지 다채롭게 연기해 내죠. 소품과 조명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재미와 몰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늙지 않는 외모, 자아는 타락해

오스카 와일드는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탐미주의(耽美主義)' 사조의 대표 예술가로 꼽힙니다. 그런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과 함께 인간의 이중성과 타락이라는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 작품으로 평가되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탄생했을까요? 두 작품 모두 배경이 19세기 중·후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말처럼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 영국은 겉으로는 눈부신 번영을 이룬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실업난과 빈부 격차 같은 사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번영과 불안이 공존하는 사회 분위기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문학 작품에도 자아 분열과 혼란, 모순을 겪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됐습니다. 지킬 박사와 도리안 그레이는 바로 이런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죠.

빅토리아 시대 런던이 배경인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세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귀족 헨리 경,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는 그의 친구 배질 홀워드, 그리고 완벽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점차 타락해 가는 청년 도리안 그레이입니다.

화가 배질은 도리안의 외모에 매료돼 그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런데 도리안은 자신의 젊음이 언젠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 대신 초상화 속 모습이 나이를 먹길 소망하죠. 놀랍게도 그 소망은 현실이 됩니다. 도리안의 겉모습은 늙지 않지만, 대신 그가 나이가 들면서 저지르는 죄와 타락은 모두 초상화에 담겼어요. 그렇게 그림 속 도리안의 얼굴은 늙고 괴물처럼 일그러져 갑니다.

이 작품은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이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도리안은 자신의 죄와 욕망을 그림에 떠넘기고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가지만, 결국 타락한 양심과 자아는 초상화에 남아 훗날 그를 파멸로 이끌죠.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에서 '나이를 먹는 초상화'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요? LED 영상으로 초상화 이미지를 만들어 시간이 흐를수록 도리안의 얼굴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원히 늙지 않는 도리안 그레이는 초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연극 ‘지킬 앤 하이드’에서 지킬 박사의 오랜 친구 어터슨(배우 강기둥). 어터슨은 지킬의 기이한 행동에 의문을 품고 그를 뒤?i다가 하이드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연극 ‘지킬 앤 하이드’에서 지킬 박사의 오랜 친구 어터슨(배우 강기둥). 어터슨은 지킬의 기이한 행동에 의문을 품고 그를 뒤?i다가 하이드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한 장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도리안 그레이(가운데·배우 재윤) 주위로 몰려들어요. LED로 구현된 도리안의 초상화(가운데 위)는 그의 타락과 함께 서서히 붉은색으로 변합니다. /PAGE1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한 장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도리안 그레이(가운데·배우 재윤) 주위로 몰려들어요. LED로 구현된 도리안의 초상화(가운데 위)는 그의 타락과 함께 서서히 붉은색으로 변합니다. /PAGE1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