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초라하게 그려진 조선군… 명 향한 고마움 강조 위해서죠

입력 : 2025.04.17 03:30

평양성 탈환도

[뉴스 속의 한국사] 초라하게 그려진 조선군… 명 향한 고마움 강조 위해서죠
최근 한남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평양성 탈환도'가 민간에 공개된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평양성 탈환도'는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평양성 전투'를 병풍에 묘사한 그림인데요. 당시 전투 상황과 전투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 사용한 무기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입니다. 평양성 전투를 그린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비롯해 국내에 몇 점이 남아 있는데, 세부적인 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구도와 장면은 같다고 해요.

평양성 전투는 1593년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이 평양성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던 전투예요. 이는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꿔 놓는 데 큰 역할을 한 사건이었어요. 오늘은 그림을 보며 임진왜란 때 평양성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평양을 두고 격전을 벌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됐어요.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조총 부대를 앞세워 조선군에 연전연승을 거뒀고, 빠르게 북상해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도 안 돼 수도 한양을 함락했죠. 당시 조선 왕 선조는 일본군 진군 소식을 듣고 개성으로 피란 갔고, 한양이 함락되자 다시 평양으로 피란을 갔어요.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세 방면(평안도·황해도·함경도)으로 북진을 이어갔어요. 그러자 선조는 평양 수비를 포기하고 다시 한번 의주로 피란을 떠납니다. 그리고 평안도로 진격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1592년 6월 평양성을 점령하지요.

임진왜란 때 일본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했어요. 명을 정벌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내주라는 것이었어요. 전쟁 초기 명은 조선이 일본군에 길을 빌려주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선조의 거듭된 원병 요청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어요. 하지만 평양성까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1592년 7월 명은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을 합니다.

1592년 7월 15일 명나라 장수 조승훈은 군사 3000명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어요. 당시 조승훈은 북방의 몽골과 여러 번 싸워 이겨 공을 세운 경험이 있다 보니 일본군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했다고 해요. 이날 밤 조승훈의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작전에 휘말리며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고 말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막혀 번번이 평양성 탈환에 실패합니다.

1593년 1월. 다시 한번 평양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요. 이때는 명의 장수 이여송이 약 5만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온 상황이었죠.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해 압박했어요. 조선·명 연합군은 평양성의 북문(칠성문), 서문(보통문), 남문(함구문)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군은 물자가 부족해지며 전세는 조선·명 연합군에 유리하게 흘러갔어요.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해 한양까지 물러나게 됩니다. 이로써 조선·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해요. 이 승리는 전쟁 초기 내내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풍당당한 명군, 초라한 조선군

'평양성 탈환도'에는 당시 상황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평양성 탈환도'를 보면, 사흘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가 화폭에 압축돼 담겨 있습니다.

그림엔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가 묘사되어 있어요. 먼저 조선군은 어디에 그려져 있을까요? '평양성 탈환도'에서 조선군의 모습은 병풍의 가장 왼쪽〈장면 ①〉에서 볼 수 있어요.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전투를 벌이는 명군과 다르게, 숫자도 적고 초라한 모습으로 한쪽 귀퉁이에 그려져 있죠. 명군과 왜군의 전투를 구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평양성 북문을 그린 대목에선〈장면 ②〉 성 바깥에서 화포를 쏘고 있는 명군의 모습이 보여요. 이들은 남병(南兵)이라고 불리는 정예군으로, 조총과 화포를 활용한 병사들이었어요.

평양성 서문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겠습니다〈장면 ③〉. 말을 탄 명군 기병이 그려져 있고, 뒤편 성벽엔 저항하는 왜군들이 보여요. 그 뒤로는 어디론가 황급히 도망가는 왜군들도 보입니다. 실제로 당시 왜군은 성 안에 땅을 파서 굴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조선·명 연합군이 성 내부로 진입하자 이 토굴로 들어가 조총을 쏘며 저항했다고 합니다.

병풍 맨 오른쪽 상단엔 명의 장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장면 ④〉이 나타나 있어요. 그 아래엔 왜군을 무찌르고 있는 명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재조지은' 분위기 속 그려져

그림만 보면 명군과 일본군의 전투처럼 보여요. 조선군이 실제 전투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음에도, 이렇게 소략하게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양성 탈환도'는 누가 언제 그렸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회화 양식과 병풍 형식 등을 봤을 때 18세기 말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임진왜란 이후 명이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지만, 조선 사회엔 여전히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존명대의론(尊明大義論)'이 강조되고 있었어요.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조선엔 청에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진정한 중화는 여전히 명이라고 생각했죠. '멸망 직전의 조선을 도와준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1704년 숙종 때 건립된 '만동묘'는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어요.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의 신종과 그의 손자인 의종을 기리는 사당이에요. 실제로 조선의 여러 왕은 주기적으로 만동묘를 정비할 것을 명령했고, 1년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내기도 했어요.

'평양성 탈환도' 역시 명군의 활약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군은 간략하게 그린 것으로 보여요. 명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죠.
장면① - ‘평양성 탈환도’에 그려진 조선군이에요. 전체 그림에서 조선군은 한 번만 등장하는데, 그마저 귀퉁이에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을 도와준 명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려고 조선군은 작게 그린 것으로 해석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장면① - ‘평양성 탈환도’에 그려진 조선군이에요. 전체 그림에서 조선군은 한 번만 등장하는데, 그마저 귀퉁이에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을 도와준 명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려고 조선군은 작게 그린 것으로 해석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장면② - 명나라 군대가 화포(가운데)로 평양성의 왜군을 공격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장면② - 명나라 군대가 화포(가운데)로 평양성의 왜군을 공격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장면③ - 말을 탄 명나라 기병이 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왜군들이 어디론가 도망가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장면③ - 말을 탄 명나라 기병이 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왜군들이 어디론가 도망가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장면④ - 말을 탄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명군(오른쪽 위)이 왜군 쪽으로 진격하고 있어요. 명군이 왜군을 제압하는 장면(아래 그림)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장면④ - 말을 탄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명군(오른쪽 위)이 왜군 쪽으로 진격하고 있어요. 명군이 왜군을 제압하는 장면(아래 그림)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성진 서울 상암고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