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고구려가 보낸 스파이, 백제 왕과 바둑 두며 쇠퇴 부추겼죠
입력 : 2025.04.03 03:30
| 수정 : 2025.04.03 04:14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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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의 화원인 백은배(1820~?)가 그린 풍속화 ‘바둑 두기’. 조선 시대 바둑은 주로 상류층의 여가 활동이었어요. 젊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은 학문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죠. /위키피디아·국립중앙박물관
나라의 운명을 바꾼 '스파이 바둑'
"웬 승려 한 사람이 어라하(백제 왕의 호칭)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서기 5세기 중엽,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백제의 수도 한성(위례성)에서 백제 21대 왕인 개로왕(재위 455~475)이 이런 보고를 받았어요. 그 승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도림이라고 합니다. 신(臣)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왕이 도림을 불러들여 바둑을 둬 보니 과연 국수(國手·장기와 바둑 등에서 그 실력이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람)라 할 만했다고 합니다. 왕은 그를 상객(上客·중요하고 지위가 높은 손님)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도림은 사실 고구려 장수왕이 파견한 첩자였습니다.
도림은 성을 쌓고 궁궐과 누각을 웅장하게 짓는 등 토목 공사를 크게 벌이도록 개로왕을 부추겼는데, 백제의 재정을 어렵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도림은 임무를 완수한 뒤 고구려로 돌아갔고,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침공해 한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개로왕은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살해당했습니다.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수도를 웅진(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옮김으로써 '한성 백제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한국사 최초의 간첩 관련 기록인 동시에 첫 바둑 관련 기록이기도 합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에서 모두 바둑이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중국에서 기원전 16~11세기 상나라(은나라)까지 기원이 올라가는 바둑이 최소한 이 무렵 우리나라에 전래됐다는 얘깁니다. 평양 림흥동에서는 1~5세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바둑판이 발굴됐고, 중국 역사서 '주서'에는 '백제인들이 장기와 바둑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에서도 5세기 고분인 황남대총과 천마총에서 바둑돌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자갈돌이 출토됐어요.
日 대신에게 '바둑 세트' 선물한 의자왕
바둑은 우리나라에서 다시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나라현에 있는 사찰 도다이지(東大寺)의 부속 건물 쇼소인(正倉院)은 일본 고대 유물 수장고인데, 이곳 소장품 중 바둑알과 바둑알 통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재위 641~660)이 일본 정치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고 기록돼 있어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일본 고대의 가장 유명한 정치 개혁인 '다이카 개신'의 주역이었습니다.
남북조 시대인 8세기에 들어서도 한반도의 바둑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738년(신라 효성왕 2년) 당나라 현종은 신라 성덕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파견해 위로했는데, 바둑 고수인 양계응이란 사람을 조문단의 일원으로 보냈습니다. 양계응은 바둑 고수들과 대국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신라에서 그를 이긴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당시 당나라는 바둑 전문 관직인 '기대조'를 둘 정도로 국가 차원에서 바둑을 관리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헌강왕(재위 875~886) 때는 신라 사람 박구가 당나라로 건너가 기대조가 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바둑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있습니다. 고려 가요 '예성강곡'과 관련해 '고려사'에 적힌 기록인데요. 고려 선종(재위 1083~ 1094) 때 국제 무역항이었던 벽란도의 김두정이라는 하급 관리가 송나라 상인의 꾐에 빠져 내기 바둑을 뒀다가 그만 아내를 빼앗겼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깁니다.
31대 임금 공민왕(재위 1352~1374)도 바둑을 좋아했는데, 윤호라는 신하와 바둑을 두면서 진 사람이 패전의 이유를 적어 주기로 했습니다. 바둑에서 진 윤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언제나 속는 것은 아니며/ 똑똑한 사람을 속이려다가는 제가 죽는다/ 한 사람의 손으로 온 천하의 눈을 막기는 어렵다'고 적었습니다. 공민왕은 그가 바둑을 빗대 자신을 비난한 것이라 여겨 멀리했다고 합니다. 윤호는 훗날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됩니다.
"용병은 바둑을 두는 것과 같은 일"
조선 초의 대표적 바둑인으로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으나 형인 세조에 의해 역모죄로 죽었습니다. '바둑의 역사'를 쓴 남치형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안평대군이 사람들을 불러 바둑을 둔 것이 역적 모의로 오해를 받은 것일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 시기엔 바둑을 용병술이나 병법에 비유하는 문장도 종종 등장했습니다. 당시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은 "용병(用兵·군사를 부림)은 바둑을 두는 것과 같아서 한 수를 잘못 놓으면 반드시 패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바둑은 부유한 사람의 검소한 취미로 여겨졌고 노인의 좋은 여가 생활로 인식됐으나, 학업과 과거 시험 준비에 힘써야 할 젊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은 좋지 않게 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영조 때 문인 이덕수(1673~1744)가 쓴 아내의 묘지명을 보면, 그의 아내는 젊어서 병상에 누워서도 남편이 바둑을 둔다는 말을 듣고는 "당신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마음이 기뻤는데 지금은 어째서 이러느냐"며 잔소리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세기가 되면 불완전하나마 바둑을 일종의 생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일부 나타났다고 합니다. 프로 기사의 원조였다고 할 만하죠. 그들로 인해 바둑은 단순 취미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올라섰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특히 18세기 말 국수로 이름을 날린 정운창은 이서구·이옥 등 여러 문인의 기록에 나옵니다. 광복 후 한국의 현대 바둑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도 개항기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바둑 근대화를 위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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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그려진 ‘곽분양행락도’ 일부분. 당나라 무장 곽자의(697~781)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연못 위 정자에서 사람들이 바둑을 두고 있습니다. 당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바둑 대결을 하기도 했대요. /위키피디아·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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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초 촬영된 사진으로, 조선인 부부가 함께 바둑을 두고 있어요. 개항기와 20세기 초를 거치며 바둑은 점차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어요. /위키피디아·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