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원래는 석가모니 사리 모시기 위한 건축물… 고려 때부터 층수가 높아졌대요

입력 : 2025.03.18 03:30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나,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어요. 탑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백제 역사를 재해석할 수 있었죠. /국가유산청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나,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어요. 탑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백제 역사를 재해석할 수 있었죠. /국가유산청
최근 전남 곡성군 태안사의 '적인선사탑'이 국보로 지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이 탑은 통일신라 시기에 세워진 탑인데요. 혜철 스님의 사리가 있는 탑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건 고대 삼국시대였기 때문에 국토 곳곳에 유서 깊은 불교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지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탑은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탑은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라고 합니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사용되던 언어지요. 이 단어를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솔도파(率堵婆) 혹은 탑파(塔婆)라고 음차(音借·외국어의 소리를 따서 표기)했고, 여기에서 탑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해요.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파고다'라고도 부르죠. 스투파는 원래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건축물이었어요.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은 불교적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전국에 수만 개의 탑을 세우고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눠 모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기엔 아시아에 새로 생기는 탑이 너무 많았던 것이죠. 한반도의 고대국가들 역시 결국 깨끗한 모래와 수정, 보석 등을 대신 넣고 탑을 건설했다고 해요. 탑엔 불경이나 각종 금석문(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 등에 새겨진 글자)도 함께 넣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이런 유물들이 발견돼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되기도 했답니다. 대표적으로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선 금으로 만든 '사리봉안기'가 출토됐어요. '사리봉안기'는 사리를 봉안한 내력을 적은 글로, 석탑 조성 과정과 건설 배경도 적혀 있어요.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 봉안기'에는 백제 무왕과 왕후가 미륵사를 중건했다는 당시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은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이라고 나와요. 이 설화에 따르면 무왕의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여야 하는데, '사리봉안기' 기록에는 백제 귀족의 딸로 기록되어 있어요. 이에 학자들은 '서동요' 설화가 사실을 반영한 얘기가 아니라거나, 무왕에게 여러 왕비가 있었다는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탑의 모양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중국에서는 주로 벽돌로 만든 전탑이나 나무로 만든 목탑이, 일본에서는 목탑이 주로 세워졌어요. 한국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전탑 양식의 탑을 만들거나, 석재를 사용했지만 목탑 건축 방식으로 짓기도 했죠.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탑의 층수가 높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이나,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지요.

김현철 서울 영동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