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세계 경찰' 역할 해온 미국… 원래는 고립주의가 원칙이었죠
입력 : 2025.03.12 03:30
미국 외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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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국제 정치 상황을 풍자한 만화. 미국을 상징하는 '엉클 샘'(오른쪽)이 바다 건너 유럽인들과 대치하고 있어요. 유럽과 얽히지 않으려는 당시 미국의 외교 정책 '먼로 독트린'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통해 많은 국가를 포섭하면서 패권을 유지해 왔습니다. 최대한 여러 국가의 시장을 개방하고, 각 지역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들의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이 미국에도 이익이 됐거든요. 하지만 최근 미국의 외교 정책에선 더 이상 패권 국가로서 희생하지 않겠다는 기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동맹국들을 대상으로 이익을 취하려고 하고 있죠.
일부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먼로주의의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먼로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미국의 외교정책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로 독트린,'유럽으로부터의 고립' 외친 美
18세기 말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였습니다.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유럽 내부의 복잡한 정세에 휘말리지 않고 벗어나고 싶어 했어요. 결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재임 1789~1797)은 '유럽의 분쟁과 동맹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며 고립주의 외교 원칙을 밝혔죠. 1793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고 이듬해엔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 시민들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도록 했죠.
그리고 1823년 미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먼로 독트린'으로 불리는 정책을 공표해요. 미국은 유럽 열강들의 국내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유럽 열강들 역시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에요.
먼로 독트린에는 '미국이 승인한 라틴아메리카 독립국가들을 유럽 국가들이 통제하려고 하면 미국에 대한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내용도 있어요. 당시 미국의 독립에 영향을 받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독립 전쟁이 많이 벌어졌는데, 여기에도 유럽이 관여하지 말라고 한 것이지요.
유럽에 대한 고립을 선포한 '먼로주의'는 이후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문제에 개입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어요. 그렇게 먼로주의는 미국 외교의 기본 원칙이 됐습니다.
국력 신장과 함께 세계 무대로
서서히 국력을 키운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세계로 영향력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 신호탄은 1898년 발발한 스페인과의 전쟁이었어요.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에선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요. 스페인이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자 미국 정부는 스페인에 진압 중단을 요구하면서 쿠바 문제에 개입했고, 양국의 외교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하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필리핀 등 스페인이 가지고 있었던 해외 식민지를 넘겨받았습니다. 미국의 팽창이 시작된 것이죠.
20세기에 발발한 두 차례 세계대전은 미국의 외교정책 기조를 크게 바꿔 놓았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유럽 전역이 전쟁터가 됐어요. 전쟁 초기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때만 하더라도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었어요. 양국 사이엔 무역과 금융 거래가 활발했고, 연합국 중엔 미국의 주요 교역국들이 많았죠. 특히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던 미국 금융권에선 윌슨 대통령에게 참전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연합국이 패하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기 때문이었죠.
그러던 중 1915년엔 독일 잠수함이 미국인들이 탑승하고 있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를 계기로 미국 내에선 참전 여론이 점점 더 강해지고, 결국 1917년 미국은 연합국 측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미국의 외교 정책이 다른 나라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입주의'로 바뀌게 된 겁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발발로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아예 버리게 되지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어요. 그러나 전쟁이 진행될수록 미국은 연합국에 대한 경제·군사적 지원을 늘리기 시작했죠. 그리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연합국 편에 서서 직접 전쟁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여러 회담을 주도하며 종전 후 국제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어요. 특히 전쟁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은 소련을 억제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게 됐습니다. 소련은 2차 대전 당시엔 같은 편에 서서 싸운 동맹국이었어요. 그러나 전쟁 이후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며 공산주의를 세계로 확산시키려 했어요. 미국은 이를 중대한 위협으로 생각하고, 소련의 팽창주의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국제 질서를 진두지휘하고자 했어요.
트루먼 독트린, 경제·군사 지원해 패권 유지
루스벨트 뒤를 이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선언을 합니다. 공산주의에 반대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국가엔 경제와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죠. 이는 유럽 세계에 대한 고립주의를 천명한 '먼로 독트린'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고 미국의 지도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에 경제 지원을 하는 '마셜 플랜'을 발표했어요. 1949년엔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과 군사 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창설했죠. 미국이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본격적으로 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후 '냉전'이 이어지며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묶고 이들에게 경제·군사 지원을 해주며 패권을 유지해 왔습니다. 당장 미국이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보여도 장기적으론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죠. 최근 나타난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일시적인 흐름일지 아니면 역사의 변곡점이 될지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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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격침당한 미국 군함. 이를 계기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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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얄타 회담에 모인 연합국 정상.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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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마셜 플랜' 선전 포스터.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