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美 식민지 만든 굴욕 조약? 지금의 한국 있게 한 '기적의 동맹'

입력 : 2025.03.06 03:30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반공포로 석방

1953년 부산 미 대사관 앞에서 휴전 반대 시위를 하는 여학생들. 피켓에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us unification or death)'라고 적혀 있어요. /조선일보DB
1953년 부산 미 대사관 앞에서 휴전 반대 시위를 하는 여학생들. 피켓에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us unification or death)'라고 적혀 있어요. /조선일보DB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에서 있었던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언쟁을 벌인 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큰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북한과 휴전 상태인 한국도 트럼프 2기 정부를 불안하게 보고 있지만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미국과 동맹국'이라는 사실이 새삼 주목받고 있어요. '한미 동맹'이라는 것은 1953년 체결되고 1954년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유를 되찾은 포로 2만7000명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새벽, 유엔군이 경비하고 있던 부산·대구·광주·마산 등 포로 수용소에서 갑자기 철조망이 뚫렸습니다. 그 사이로 포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어요.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반공(反共·공산주의에 반대함)포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을 구출하고 나선 사람들은 국군 헌병대였죠. 깜짝 놀란 유엔군은 탱크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수색에 나섰지만, 수용소 주변의 주민들은 탈출한 포로들을 숨기고 옷을 갈아입혀 줬습니다.

'난데없는 대탈주극' 모양새가 된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해 3만5000여 명의 반공포로 중에서 약 2만7000명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탈출 과정에서 유엔군의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은 60명이 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비밀리에 이들을 풀어주라고 지시를 내려 전격적인 석방을 단행했던 거예요. 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일까요?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북한군 포로는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인도주의적 입장도 물론 있었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1953년의 세계 정세는 급격히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해 1월에는 6·25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건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고, 3월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했습니다. 소련 정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이제 본격적인 정전(일시적으로 전쟁을 중단함) 협상이 재개됐지만, 이 대통령은 4월 9일 휴전을 반대하고 한국 단독으로 북진(북쪽으로 진격)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전쟁 당사자인 한국의 의견이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한 많은 국민이 대규모 휴전 반대 시위에 나섰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반공포로 석방이 이뤄졌던 거예요.

'휴전하려면 한국의 안전 보장' 요구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이 반드시 북한 공산당을 격멸하는 '북진 통일'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휴전이 이뤄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북한군은 물론 대규모 중공군 병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언제 또다시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일지 모르는 불안한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미군을 한반도에 붙잡아 두고 안전을 보장받는 '조약' 수준의 확약을 받아야 했던 것이죠.

따라서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압박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고, 한때 이 대통령을 암살하거나 정치적으로 축출하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승만은 반미주의자가 아니고, 그가 원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단독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달래는 것이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으리라고 판단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반공포로 석방 1주일이 지난 1953년 6월 25일, 미국 특사인 로버트슨 미 국무부 차관보가 방한했습니다. 그는 18일 동안 이 대통령과 회담했는데 요약하자면 '당신 요구를 받아들일 테니 휴전 협정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죠. 이 대통령은 여기서 마침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장기간의 경제 원조,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킬 것 등의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한국을 번영하게 한 동맹

이승만·로버트슨 회담 직후인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 사이에 정전 협정이 조인돼 전쟁이 멈췄습니다. 두 달 남짓 지난 10월 1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 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서에 정식 서명을 했습니다. 이 조약은 1954년 11월 18일부터 발효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앞으로 이 조약이 우리를 번영케 할 것이며, 우리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약의 제2조는 '당사국(한미) 중 어느 1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중략) 단독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自助)와 상호 원조에 의하여 무력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 강화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이 다시 무력 남침을 할 경우 미군이 개입하게 된다는 의미죠.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위험에 대한 확실한 대비책이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게 됐고, 한미 관계는 동맹 수준으로 격상됐습니다.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외국군을 주둔시켜 남한을 식민지나 다름없게 만든 굴욕적 조약'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다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신념과 결단에 의해 이뤄진 이 조약은 6·25 이후 70년 넘게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되게 한 기본적인 요인이었고, 산업도 자원도 없는 한국이 세계 최강대국을 상대로 얻어낸 '기적의 동맹'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휴전 중인 대한민국이 국방비에 과도한 자원을 들이는 대신, 그 비용을 경제 발전에 투자할 수 있게 한 열쇠가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훗날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로 진입할 수 있었던 기반인 동시에, 북한을 포함한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 공격 충동을 억제함으로써 한국의 안보와 생존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1953년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태극기와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어요. /기파랑
1953년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태극기와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어요. /기파랑
1953년 6월 한국을 찾은 로버트슨(왼쪽) 미 국무부 차관보와 이승만 대통령의 회담 장면. 18일 동안의 회담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받았어요. /국가기록원
1953년 6월 한국을 찾은 로버트슨(왼쪽) 미 국무부 차관보와 이승만 대통령의 회담 장면. 18일 동안의 회담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받았어요. /국가기록원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덜레스(왼쪽) 미 국무 장관과 변영태 외무 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조선일보DB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덜레스(왼쪽) 미 국무 장관과 변영태 외무 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조선일보DB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