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英 고립시키려 벌인 무역 전쟁… 나폴레옹 몰락 앞당겼죠

입력 : 2025.02.12 03:30

무역 전쟁

독일 화가 아돌프 노던이 1851년 그린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대륙 봉쇄령에서 이탈한 러시아를 응징하려 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합니다. /위키피디아·브리태니커
독일 화가 아돌프 노던이 1851년 그린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대륙 봉쇄령에서 이탈한 러시아를 응징하려 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합니다. /위키피디아·브리태니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어요.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캐나다·멕시코 등 주요 대미 철강 수출국에 타격을 줄 전망이에요. 미국은 자동차·반도체·의약품 등 품목에 대해서도 관세 부과를 검토 중입니다. 트럼프는 지난 4일 중국에 대해 10%의 추가 관세를 적용했습니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해서도 25%의 관세 부과를 예고했다가 한 달간 유예한 상태입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무역 전쟁"이라고 비판하고 있어요. 과거에도 무역으로 인한 국가 간 분쟁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역사 속 '무역 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메랑이 된 '대륙 봉쇄령'

가장 유명한 무역 전쟁 중 하나는 프랑스 나폴레옹이 영국을 상대로 벌인 것이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1804년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유럽 제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역시 장악하지 못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의 오랜 라이벌 영국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선두 주자로서 나날이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어요.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스페인과 연합 함대까지 구성했지만,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하고 말죠. 결국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무역 봉쇄 카드를 선택합니다.

1806년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잘 알려진 '베를린 칙령'을 발표했어요. 주된 내용은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거나 프랑스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유럽 국가에 대해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은 큰 효과를 거둘 것처럼 보였어요. 당시 영국은 철이나 목재 등의 물자를 수입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결과는 나폴레옹의 생각과는 반대였어요. 봉쇄 기간이 길어지자 다른 유럽 국가들이 피해를 보기 시작한 거예요. 특히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는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여러 공산품을 수입했는데 대륙 봉쇄령으로 경제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결국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무역을 재개했어요. 다른 국가들도 프랑스의 통제를 피해 밀무역을 하기 시작합니다.

대륙 봉쇄령을 계기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엔 큰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했어요. 하지만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 고립되고 맙니다. 게다가 원정 거리가 길어지며 물자 보급도 제대로 되지 못했죠. 약 60만 명의 원정군 중 프랑스로 돌아온 병사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죠.

무역 둘러싼 갈등이 내전으로

관세 문제로 인해 미국에선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각 주(州)의 주권을 인정하는 연방제 공화국으로 시작됐고 지금도 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미국은 건국 이후 공업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북부와 남부 주 사이의 산업 격차가 생겼는데요. 이것이 내전인 남북전쟁(1861~ 1865)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죠.

전쟁이 일어난 이유 중엔 노예제 외에도 관세 문제가 있었어요. 당시 북부는 상공업이 막 발전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유럽의 선진 공업국과 경쟁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품질 좋은 외국 제품이 미국에서 대량으로 팔리지 않도록 연방 정부가 수입 관세를 높게 매기는 보호무역 정책을 펴길 바랐죠. 반면 남부는 주로 대규모 농장에서 면화를 재배해 유럽 국가들에 수출했어요. 미국이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한다면 유럽 국가들도 보복 관세를 매길 수 있기 때문에, 관세 부과를 반대했죠.

시간이 지날수록 남북의 경제 격차는 더욱 커졌어요. 북부는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이루며 부를 축적한 반면, 남부는 여전히 농업 중심의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경제 발전으로 인구마저 북부에 몰리게 됐죠. 이런 상황에서 미국 의회는 1828년과 1832년 두 차례에 걸쳐 수입 관세를 높이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그러자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수출하는 품목에 보복 관세를 적용했고, 농산물 수출에 의존하던 남부는 큰 피해를 입게 됐어요. 일부 남부 주는 관세법이 무효라고 선언하기도 했죠.

여기에 노예제 문제까지 겹치며 남북 간의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의 줄기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데요. 그만큼 관세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이죠.

무역 적자 줄이려 마약 판매

중국의 '아편전쟁' 역시 역사적인 무역 전쟁 중 하나입니다. 17세기 중반 이후 유럽에는 본격적으로 중국의 차(茶)가 들어오기 시작해요. 차는 특히 영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아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됐어요. 영국인들은 매년 엄청난 양의 차를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습니다. 청나라로 향하는 상선은 차를 사기 위한 은으로 가득할 정도였죠.

하지만 영국은 중국에 팔 만한 물건이 거의 없었어요. 청나라는 대부분의 물건을 자급자족하고 있어 영국 제품 수요가 적었거든요. 따라서 영국은 막대한 규모의 무역 적자를 보게 됩니다.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영국이 생각한 방법은 마약인 아편을 청나라에 수출하는 것이었어요. 영국 영향력 아래 있는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고, 여기서 얻은 은은 다시 영국으로 흘러 들어와 차 구입 대금으로 쓰였죠. 중국인들은 점차 아편에 중독되어 갔어요. 곧 양국의 무역에서도 은 유입량이 역전됐죠.

청나라는 곳곳에 아편이 퍼지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편을 피웠고,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며 국가 재정까지 파탄 났습니다. 청의 황제 도광제는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 아편을 강력 단속했는데, 영국은 이를 무역 방해로 간주하고 1840년 청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전쟁은 1842년 영국의 승리로 끝났는데요. 종전 조약인 난징조약이 체결되며 청은 영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강제로 시장도 개방해야 했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게티즈버그 전투(1863)를 묘사한 그림. 상공업 위주의 북부는 보호무역을 주장했어요. /위키피디아·브리태니커
미국 남북전쟁 당시 게티즈버그 전투(1863)를 묘사한 그림. 상공업 위주의 북부는 보호무역을 주장했어요. /위키피디아·브리태니커

청나라 관료 임칙서가 아편 폐기 현장을 감독하는 그림. 청이 아편 수입을 금지하자 영국은 청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위키피디아·브리태니커
청나라 관료 임칙서가 아편 폐기 현장을 감독하는 그림. 청이 아편 수입을 금지하자 영국은 청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위키피디아·브리태니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