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1840년 체결된 조항 3개짜리 조약… 마오리족 운명 뒤바꿔 놨죠

입력 : 2025.01.08 03:30

와이탕이 조약

작년 11월 뉴질랜드 의회에서 마오리족 출신 의원 하나라위티 마이피클라크가 와이탕이 조약을 재해석하는 법안을 반대하는 의미로 법안 사본을 찢었어요. 그는 이후 마오리족의 전통 춤 ‘하카’를 췄어요. /틱톡
작년 11월 뉴질랜드 의회에서 마오리족 출신 의원 하나라위티 마이피클라크가 와이탕이 조약을 재해석하는 법안을 반대하는 의미로 법안 사본을 찢었어요. 그는 이후 마오리족의 전통 춤 ‘하카’를 췄어요. /틱톡
최근 뉴질랜드 의회에서 한 여성 의원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는 영상이 화제가 됐어요. 주인공은 마오리족 출신 하원 의원 하나라위티 마이피클라크였죠. 그는 의회에서 마오리족 전통 춤인 '하카'를 췄답니다. 춤사위가 격렬해지며 의회 일정도 잠시 멈췄어요.

그는 뉴질랜드의 보수당 액트(Act)가 내놓은 법안에 반대하기 위해 춤을 췄다고 합니다. 1840년 영국과 마오리족은 마오리족의 주권과 권리를 명시한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했는데, 액트당이 주도해 이 조약 내용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했거든요. 액트당은 "와이탕이 조약은 마오리족에게만 특권을 부여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마이피클라크를 포함한 반대파는 "마오리족 문화를 축소하거나 없앨 수 있다"고 반발했어요. 시민들도 조약 재해석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와이탕이 조약이 무엇이길래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걸까요? 오늘은 마오리족의 역사와 와이탕이 조약에 대해 알아볼게요.

마오리족의 땅,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원래 폴리네시아 타히티섬 부근에 살던 부족으로 13세기쯤 뉴질랜드에 정착했어요. 폴리네시아는 호주 동쪽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1000여 개의 섬을 말한답니다. 뉴질랜드는 크게 북섬과 남섬으로 나뉘는데요. 당시 마오리족 대부분은 북쪽에 정착해서 부족을 이루고 살았답니다. 그런데 그들의 터전에 원치 않던 이방인이 찾아왔어요. 바로 영국 탐험가들이었죠.

1769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 탐험대는 뉴질랜드의 북섬에 상륙했어요. 이후 영국인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특히 범죄자들의 새로운 유배지로 주목받았죠.

이방인들로 인해 마오리족 사회는 변하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도 마오리족 사회는 부족 간 전쟁이 빈번했지만, 유럽인이 가져온 머스킷 총으로 인해 전쟁은 더 과격해지고 잦아졌습니다. 점차 뉴질랜드로 이주하는 영국인이 많아지자 영국 정부는 뉴질랜드의 질서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1833년 제임스 버스비를 영국 대표로 뉴질랜드에 파견했죠. 하지만 뉴질랜드의 질서는 쉽게 안정되지 않았어요. 그러자 영국 정부가 뉴질랜드 문제에 더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이 파견됐어요. 그리고 영국은 뉴질랜드를 공식적으로 합병하고 식민지로 만들기로 했죠. 그래서 영국 정부는 뉴질랜드 북섬의 와이탕이에서 마오리족과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이 마오리족의 삶을 바꿔놓게 됩니다.

갈등의 씨앗 된 와이탕이 조약

총 3개 조항으로 이뤄진 조약문은 나흘 만에 완성됐어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마오리 부족장들은 각자의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주권을 영국 여왕에게 양도할 것. 둘째, 마오리족의 재산은 보장되지만 부족 토지를 판매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는 영국 군주나 군주의 공식 대리인에게 양도할 것. 셋째, 영국 왕실은 뉴질랜드의 모든 원주민에게 영국 국민과 똑같은 권리와 보호를 제공할 것. 정리하자면 마오리족은 영국 왕실에 주권을 넘기고 영국은 마오리족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한다는 것이었죠. 이 조약이 체결된 2월 6일은 뉴질랜드 건국 기념일로 지정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답니다.

문제는 조약문 번역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당시 마오리어에 능통한 영국인은 없었고 그나마 마오리어를 할 줄 아는 영국 국교회 사제에 의해 하룻밤 만에 조약문이 번역됐습니다. 마오리족에는 근대 국가의 '주권'이란 개념이 없었어요. 당연히 이를 나타내는 마오리어도 없었지요. 그래서 영국인들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마오리족 단어를 사용했죠. 마오리족은 조약에 명시된 주권이란 단어를 '영국 정부의 관리 권한' 정도로 이해했고, 당연히 부족장이 통치권을 계속 갖는다고 생각했어요. 자신들의 땅과 마을에 대한 권리도 계속 행사한다고 생각했죠.

이후 영국과 마오리족은 조약문을 두고 많은 갈등을 빚었어요. 마오리족의 토지 소유권을 두고 시작된 충돌은 결국 1845년 전쟁으로까지 이어집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이 전쟁으로 마오리족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전쟁에서 패배한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내에서 점점 소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권리 찾기 위해 '평화 행진' 시작

마오리족은 20세기 들어 여러 법률이 제정되면서 점점 더 땅을 빼앗겼어요. 1953년엔 마오리족이 사용하지 않는 땅을 비마오리(백인)인이 장기간 임차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됐고, 1967년엔 이 법을 개정해 마오리족 공동 소유의 땅을 개인 소유로 전환하도록 했죠. 결과적으로 많은 마오리족 토지가 백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마오리족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 1970년대부터 사회운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오리어로 '행진'을 뜻하는 '히코이'인데요. 마오리족 활동가들은 평화 행진을 통해 뉴질랜드 정부에 항의했어요. 1975년엔 뉴질랜드 북섬 최북단에서 시작해 수도 웰링턴의 국회의사당까지 약 1000km를 걷는 '마오리 토지 행진'이 진행됐죠. 시위자들은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뒤 마오리족 6만여 명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제출하며 토지법 개혁을 요구했어요.

결과적으로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뉴질랜드 시민들은 마오리족의 삶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마오리족의 토지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는 특별 재판소가 설치된 것입니다.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는 여전히 낮은 편에 속해요. 최근 마오리족의 사회운동 등에 힘입어 뉴질랜드 정부는 이들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작년 11월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마오리족들이 와이탕이 조약 재해석 법안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작년 11월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마오리족들이 와이탕이 조약 재해석 법안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의 초상화. 그는 뉴질랜드를 처음 탐험한 영국인이었어요.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뉴질랜드로 이주해 정착했습니다. /위키피디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의 초상화. 그는 뉴질랜드를 처음 탐험한 영국인이었어요.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뉴질랜드로 이주해 정착했습니다. /위키피디아
1840년 와이탕이 조약이 맺어질 당시 모습을 재구성해 그린 그림이에요. 영국 정부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오리 부족장들이 조약에 서명하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1840년 와이탕이 조약이 맺어질 당시 모습을 재구성해 그린 그림이에요. 영국 정부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오리 부족장들이 조약에 서명하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