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철학·인문학 이야기] 이슬람과 타협해 예루살렘 되찾은 황제… 교황에겐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죠

입력 : 2024.12.31 03:30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브리태니커
/브리태니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1194~1250·사진)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어요. 당시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되찾는 일은 신이 내린 의무였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제6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황제였어요. 그는 차분하게 오랜 세월에 걸쳐 군사와 장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 다다랐을 때는 정작 전투를 벌이지 않았어요.

당시 상대편이던 이슬람 측 지도자는 술탄 알 카밀입니다. 그 역시 현실 정치에 밝았던 인물이지요. 황제와 술탄은 길고 긴 협상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둘은 합의에 이릅니다. 예루살렘의 성역(聖域)은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이곳에 오는 유럽 순례자들의 안전도 보장한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라는 평전을 쓴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이는 합리적인 타협이었습니다. 기독교도들은 오랫동안 원하던 성지를 얻게 되었고, 이슬람 측 입장에서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며 자기들 땅에 다시 쳐들어올 명분이 사라졌으니까요. 이제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는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로마의 교황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해 버립니다. 교황의 눈에는 황제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위해 너무 오래 준비한 것이 성전을 피하려고 꼼수를 부린 것으로 보였고, 이교도(이슬람)와 타협했다는 사실 자체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교황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성스러운 땅을 피를 흘려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슬람 측에서도 술탄의 협상을 수치로 여겼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서도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문을 당했어도 프리드리히 2세는 강력한 황제였습니다. 이후로 황제와 교황 사이에 날카로운 대결이 이어졌지요.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앞세웠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셈이지요. 반면, 당시 기독교는 '교황이 태양이라면 황제는 달'이라는 표현처럼 교회가 세상의 모든 권력 위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고대 로마제국처럼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켜 안정된 제국을 다시 만들려고 했습니다. 반면 교황은 모든 권위는 오직 신에게서 나오며, 황제의 권력은 교회를 넘어서면 안 된다며 강하게 맞섰지요. 그 결과 황제는 세 번이나 파문을 당하며 이단으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황제와 교황 가운데 누구의 말이 맞았을까요? 황제가 죽은 후 중동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십자군이 중동 지역에 세운 국가들은 최후를 맞았고, 교황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고 말지요. 혼란한 시대, 프리드리히 2세 시대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혜안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