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빈곤과 굶주림의 시대, 희망 재건했던 '불굴의 기업가' 있었죠
입력 : 2024.12.30 03:30
기업가 정신 다룬 뮤지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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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스윙데이즈_암호명A'의 한 장면. 유일형(가운데 오른쪽)은 한반도 비밀 침투 작전에 참여하기로 결심합니다. 베로니카의 환영(가운데 왼쪽)이 유일형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있어요. /컴퍼니 연작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도 두각을 나타낸 기업가들이 있었어요. 바로 제약회사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1895~1971) 박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회사인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1919~2014) 회장입니다. 두 사람 모두 어려운 시대에 기업을 세우고 국민에게 의약품과 먹거리를 공급한 공헌으로 유명하지요. 선구적 기업 문화를 정착시키기도 했고요. 최근 이들 삶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두 편이 무대에 올랐는데요. '스윙데이즈_암호명 A'(2025년 2월 9일까지·충무아트센터 대극장)와 '면면면'(12월 16일 종료)입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기업가
유일한은 평안도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불과 9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요. 아들이 식견을 넓혀 민족을 위해 일하길 바랐던 아버지의 결심 덕분이었지요. 어린 유일한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에 집중했습니다. 재미 교포들이 주최하는 항일 집회에도 참여하면서 강인하게 성장했죠. 미시간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숙주나물 통조림을 개발해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판매해 성공을 거둡니다.
미국에서 큰돈을 번 유일한은 고국행을 결심합니다. 출장차 들렀던 고국의 국민이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죽음에 이르는 비참한 상황을 봤기 때문이에요. 그는 1926년 귀국해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하죠. 그가 미국에서 일군 사업도 정리합니다.
그는 왜 제약회사를 만들었을까요? 당시 그는 '건강한 국민만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선 약이 매우 귀해 병에 걸려도 약을 구하기 힘들었어요. 약을 구한다고 해도 약품 효능을 알기 쉽지 않았죠. 유한양행은 우리나라 최초로 약을 만든 약제사와 의학 박사의 이름을 실은 신문 광고를 하며 신뢰를 쌓기 시작합니다. 1933년엔 소염 진통제 '안티푸라민'을 개발했죠.
유한양행은 1939년 '종업원 지주제'를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했습니다. 회사 직원들이 자사 주식을 일정 부분 소유하는 제도인데요. 미국과 유럽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하고 경영자의 수직적인 의사 결정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로 도입된 경영 방식이에요. 창업주 중심의 우리 기업 문화 속에서 당시 유일한의 이런 경영 방식은 선구적이었습니다.
유일한은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어요. 그는 1942년 미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OSS(미전략첩보국)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군사훈련까지 받았어요. OSS의 한반도 비밀 침투 작전에도 참여했다고 해요. 이 작전은 1945년 8월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결국 실행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은 유일한의 당시 나이가 50세였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다시 뮤지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스윙데이즈'는 독립운동가 유일한의 활약상을 조명합니다. 작품엔 유일한 박사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 '유일형'이 등장해요. 여기에 더해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베로니카'라는 여자와 조선총독부 형사과장 야스오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죽은 베로니카의 환영은 주인공 유일형의 주변을 맴돌아요. 그러면서 유일형이 독립운동의 대의와 개인의 안락한 삶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죠. 죽은 베로니카는 당시 성공한 사업가였던 유일한이 왜 몸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했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1940년대 상하이와 일제강점기 시기 경성(서울)을 화려한 LED 영상으로 표현한 대형 무대 배경이 볼거리인데요. 작곡가 제이슨 하울랜드의 다채로운 음악은 마치 첩보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긴장감을 더하며 뮤지컬의 완성도를 높였어요. 하울랜드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와 '데스노트' 음악의 편곡자이기도 합니다.
가난에서 개발된 한국인의 '솔푸드'
뮤지컬 '면면면'은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이 쓴 동명 장편소설 '면면면'이 원작이에요. 국내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 '삼양라면'을 만든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죠.
전쟁의 포성이 멈춘 1953년. 대다수 국민은 끼니를 제대로 챙기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광복 이후 보험회사 부사장까지 지내며 승승장구하던 전중윤은 어느 날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남긴 잔반을 모아 끓인 '꿀꿀이죽'을 사려는 긴 줄을 보며 결심합니다. 값싸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죠. 그가 떠올린 것은 1959년 일본 출장길에 맛본 라면이었습니다.
이후 전중윤은 라면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삼양라면 개발에 성공했고, 1963년 한국인의 '솔(soul)푸드'를 내놓습니다. 당시 삼양라면은 꿀꿀이죽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가격이 쌌습니다.
뮤지컬 '면면면'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라면의 역사뿐 아니라 사랑 이야기까지 담은 작품입니다. 주인공 항필은 시장에서 꿀꿀이죽을 끓여 파는 영희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팍팍한 삶 속에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지요. 하지만 영희는 훗날 부대찌개집 사장으로 성공했고, 나중에 항필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작품의 양정웅 연출가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개회식 총연출을 맡았던 인물이기도 해요.
두 작품은 어려웠던 시절 더 나은 미래를 꿈꿨던 기업가들의 삶과 도전을 무대 위에서 아름답게 펼쳐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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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면면면' 공연에서 삼정라면 직원들과 영희 자매가 회식을 하는 장면이에요. 삼정라면은 영희의 부대찌개 레시피를 접목해 만든 라면으로 성공을 거둡니다. /국립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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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면면면' 공연에서 삼정라면 직원들이 '값싸고 맛좋은 삼정라면'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거리에서 직접 라면을 홍보하고 있어요. /국립정동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