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902년 하와이로 간 한국인 100여명… 첫 미주 지역 이민이었죠
입력 : 2024.12.26 03:30
해외 이주 역사
- ▲ 먼저 도착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모습. 한국인의 미주 지역 이민은 1902년 12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떠나면서 시작됐어요.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하지만 과거 한국이 가난했을 때는 지금과 정반대의 모습이었어요. 많은 한국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진출하면서 그곳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늘어나자 해외 각 지역에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도 했지요. 오늘은 역사 속 한국인들의 해외 이민사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국인, 하와이로 노동 이민 가다
한국인의 미주 지역 이민은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떠나면서 시작됐어요. 당시 하와이에선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들이 많았고,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임금이 비교적 저렴한 외국인으로 채우고 있었죠.
이에 주한 미국 공사인 앨런은 하와이 총독에게 한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권유하였고, 대한제국 정부 역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민 사업을 추진했어요.
1902년 12월 22일 한국인 121명이 하와이로 가기 위해 인천 제물포를 떠났어요. 중간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일부를 제외하고 102명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어요. 이를 시작으로 1903년에 1100여 명, 1904년에 3400여 명, 1905년에 2600여 명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났어요.
하지만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이민 금지령을 내려 하와이로의 노동 이주 사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는 하와이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인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일본 정부의 압력 때문이었어요.
한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들게 일했습니다. 현지 농장 관리자는 채찍을 휘두르며 이들을 관리하고 감시했다고 해요. 또 하와이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무척 고단한 노동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 오후 4시 30분까지 일했어요. 휴식 시간은 고작 30분밖에 되지 않았죠. 허름한 판잣집이 숙소였고, 이부자리는 한 사람당 담요 한 장뿐이었어요.
이처럼 강도 높은 노동과 열악한 환경에 비해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고 해요. 남자는 65~67센트, 여자는 50센트 수준의 일당을 받았어요. 당시 미국 본토 노동자들보다 훨씬 적은 액수였어요.
정치적 격변 속 해외 이주 늘어
하와이로의 노동 이주가 정부의 공인하에 진행됐던 반면, 한반도와 비교적 가까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의 이주는 새로운 땅을 찾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었어요.
만주로의 이주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요. 봄에 간도로 건너갔다가 가을에 돌아오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다가, 점차 가족 단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간도 이주자 수는 1890년대 2만여 명에서 1900년 전후 10만여 명까지 늘어났어요.
항일운동을 위해 간도로 이주하는 이들도 많았어요. 신민회(新民會)의 지도부가 간도로 이주하였던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신민회 간부들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처분하였고, 그 자금과 함께 간도로 이주하여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고 정착하게 됩니다.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국인도 있었어요. 연해주는 러시아가 1860년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지역이에요.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하기 위해 한국인의 이주를 적극 허용했다고 해요. 국권 피탈 이후인 1911년 항일운동가들이 연해주에서 한국인 자치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했어요. 연해주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런데 1937년 소련 당국은 연해주 등에 살던 우리 동포 17만여 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켰어요. 이 과정에서 많은 동포들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강제 이주 이유에 대해선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라는 설부터 고려인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치구가 만들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까지 여러 견해가 존재합니다.
파독 근로자, 경제 발전에 기여
6·25전쟁을 치른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중 한 곳이었어요.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 남짓으로 필리핀보다 낮았지요. 한국은행 외환 보유액 역시 2000만달러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경제 발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서독과 경제 협약을 체결하여 광부, 간호사 등 인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어요. 서독 측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우리나라는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았던 겁니다. 1970년대 중·후반까지 8000여 명의 광부와 1만2000여 명의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가 독일로 파견됐어요.
파독 근로자들은 낯선 땅에서 힘들지만 열심히 일했다고 해요. 한국인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은 현지 신문에도 보도됐습니다. '한국의 천사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대요.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1965년부터 10년간 우리나라에 송금한 외화는 1억달러가 넘는다고 해요. 특히 1965~1967년 송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6~1.9%에 달할 정도였죠. 머나먼 타지로 이주한 이들의 노력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1903년 발행된 하와이 이민자 여권.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 ▲ 1900년대 초 가을 타작을 하고 있는 간도 지역 이주 한인들. /조선일보 DB
- ▲ 독일에 광부로 파견된 근로자들이 탄광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 ▲ 독일의 한 병원에서 파독 간호 인력이 환자를 보살피고 있어요.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1965년부터 10년간 우리나라에 송금한 외화는 1억달러가 넘는다고 해요.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