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왕조실록에 6462번 나온 '탄핵'… 도덕적 해이가 주된 이유
입력 : 2024.12.19 03:30
조선의 탄핵
- ▲ 지난 4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상속 유류분 제도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들이 착석해 있어요. 임금이 탄핵 최종 판단을 내린 조선 시대와 달리 오늘날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하죠. /장련성 기자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2016년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은 기각했지만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파면을 결정했습니다. 현 정부 들어서 야당 주도로 장관과 감사원장, 검사 등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것은 비상계엄 선포 전까지 13번이나 됐습니다. 이는 '지나친 입법 횡포'란 비판을 받았고 계엄 선포의 한 원인이 됐다는 말도 듣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탄핵'이란 무엇이고 우리 역사에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던 걸까요?
조선왕조실록에 6462번 등장한 '탄핵'
'탄핵소추'의 소추(訴追)란 '하소연할 소(訴)'에 '쫓아낼 추(追)'로 이뤄진 말입니다. '고급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헌법이나 법률을 어겼을 경우 탄핵을 결의하는 일'이란 뜻이죠. 그럼 탄핵(彈劾)은 무슨 뜻일까요. '퉁길 탄(彈)'에 '캐물을 핵(劾)'으로서, 원래 뜻은 '죄상을 들어서 책망함'입니다. 법률 용어로는 '보통의 절차에 의한 파면이 어려운 대통령·국무위원·법관 등을 국회에서 소추해 해임하거나 처벌하는 일'이라고 풀이됩니다. 이렇게 쓰일 때 탄핵이란 영어의 임피치먼트(impeachment)를 번역한 개념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 전통적인 의미는 '관리의 죄과를 조사해 임금에게 아뢴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말로 대론(臺論)이나 대탄(臺彈)이 있었죠.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검색해 보니 번역문 기준으로 탄핵이란 말이 나오는 기록은 모두 6462건 등장했습니다. 선조실록이 767건으로 가장 많았고 중종실록(549건), 숙종실록(537건)이 그 뒤를 이었어요.
관리 탄핵을 맡은 기관은 주로 삼사(三司)라 불렸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었습니다. 조정의 정치와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견제하는 기능을 맡은 곳으로 이들을 '언론(言論) 삼사'라고도 했습니다. 사헌부는 관리 감찰이나 인사에 관여했고, 사간원은 임금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절히 말하는 '간쟁'을 했죠. 홍문관은 임금의 학문적·정치적 자문에 응하면서 무엇이 옳은지 알려주는 역할이었습니다.
권력 교체 시기에 많이 일어나
조선의 탄핵은 무척 매서웠습니다.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며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탄핵의 근본적인 이유는 '도덕적 해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성 축조 공사의 감독을 소홀히 했다' '왕비의 상중에 술을 마셨다' '궁중 기밀을 누설했다' '자신의 범죄 기록을 파기했다'처럼 유교적으로 용납될 수 없으면서 체제 유지에 해를 입힌 일들이 주요 탄핵 대상이 됐어요.
탄핵이 유독 자주 일어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큰 정변이 발생한 직후 권력 집단의 교체와 논공행상(공적의 크고 작음을 논의해 그에 알맞은 상을 줌)이 있을 때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1506년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10대 임금 연산군이 쫓겨나고 11대 중종이 즉위했는데요. 그로부터 1507년(중종 2년) 4월까지 불과 7개월 동안 탄핵 관련 사건이 실록에 무려 81건이나 등장합니다.
'임금의 후궁에게 잘 보여 갑자기 좋은 벼슬을 얻었다' '권세를 업고 권력을 남용했다'는 등의 이유로 연산군 시절 중요한 자리에 있던 관리들이 탄핵 대상이 됐어요. 심지어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이점마저 자신이 통솔하는 사헌부 관리들에게 탄핵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경상도 감사 시절에 흰 꿩을 임금에게 바쳐 아첨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엔 임금이 좋은 정치를 펼치면 하늘에서 흰 꿩이나 흰 사슴을 길한 징조로서 보내준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연산군 같은 폭군에게 그런 것이 말이 되느냐는 얘기였죠.
19세기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원군 탄핵'
많은 경우에 탄핵을 제안한 사람도 탄핵을 당한 사람 못지않게 역풍을 맞았다는 점에서 탄핵은 '양날의 칼'이기도 했습니다. 그 상처는 탄핵 대상이 지닌 권력에 비례했습니다. 1501년(연산군 7년) 권신(권세를 지닌 신하) 유자광을 탄핵한 홍문관 관리들은 임금의 분노를 일으켜 의금부에 체포됐습니다. 1797년(정조 21년)엔 이태현이란 신하가 병조판서 인사 문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좌의정 채제공의 탄핵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벼슬아치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가장 충격적인 탄핵이라면 역시 '대원군 탄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1873년(고종 10년) 최익현은 서원 철폐 등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을 탄핵해 실각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임금의 친아버지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죠.
군주제 시대에 탄핵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최종 판단은 오늘날처럼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임금이 내렸습니다.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정적인 왕자 이방원(훗날의 태종)의 편이었던 권근에 대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주상(임금)을 고자질했다"며 탄핵했습니다. 이제 공은 태조 이성계에게 넘어간 것인데, 그는 권근에 대해 "내게 공(功)이 있으니 오히려 상을 줘야 한다"며 벌주지 않았어요. 태조의 입장에선 정도전과 권근 모두 자신을 도와 조선을 창업한 개국공신이니 누구 한 사람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조선 왕조에서 탄핵 대상이 됐던 사람은 그 사유가 가벼운 경우라고 해도 사직을 청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탄핵 자체를 불명예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탄핵에서 더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군주 1인을 빼고 모두 그 대상이 될 만큼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권력자를 올곧게 비판하는 방법이기도 했으나, 때론 권력투쟁과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 ▲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사간원 전경. 사간원은 임금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언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국가유산청
- ▲ 정도전(왼쪽)은 정치적으로 반대편이었던 권근을 탄핵했어요. 정조 땐 이태현이라는 신하가 채제공(오른쪽)의 탄핵을 건의했는데, 오히려 이태현이 징계를 받았어요. /전통문화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