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알기 쉬운 법률] "공개된 법정서 유무죄 가려야"… 판사가 직접 증언 판단하죠
입력 : 2024.12.18 03:30
공판중심주의
- ▲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재심’의 스틸컷. 어머니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아들의 팔을 잡은 채 울고 있어요. /오퍼스픽쳐스
형사재판의 목표는 피고인이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는지 가리는 것입니다. 증거를 통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인정되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하고, 그러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하죠. 유무죄 판결은 'OX 퀴즈'처럼 한 가지 선택지를 고르면 되는 간단한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방범 카메라 영상이나 DNA 같은 확실한 증거가 남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대신 '그랬을 것으로' 보이는 애매모호한 정황 증거들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죠. 목격자들의 진술도 엇갈리고, 사람의 기억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경찰관들은 용의자의 자백을 얻으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법원은 어떤 방식으로 죄를 가릴까요? 우리나라 법원은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인권이 침해되는 일을 막기 위해 공개된 법정에서 유무죄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은 공판중심주의에 대해 알아볼게요.
'고문'이 정당한 절차였던 시절도
1980년대 전국을 들썩이게 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본 적 있나요? 영화에선 직감을 중시하는 동네 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이 불량배들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와 달리 서울지방경찰청에서 파견된 형사 서태윤(김상경 분)은 박두만의 수사가 인권침해적인 구식 수사라며 비판하죠. 하지만 별다른 물증이 나오지 않자 과학 수사를 신봉한 서태윤 역시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총을 들이밀며 자백을 강요합니다.
사실 '자백 강요'는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자백이 '증거의 왕'이라는 말이 존재했을 만큼 자백을 중요시했어요. 피의자에 대한 고문이 정당한 수사 절차로 인정될 정도였죠. 만약 피고인이 죄를 지었다면 고문은 그렇게 부당한 것이 아니고, 죄가 없다고 해도 마땅히 이겨내야 하는 시험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강제로 끌어내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진범이 범행을 실토하게 하는 게 중요하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고문이 정당화될 순 없지요.
공판중심주의는 이런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습니다. 피고인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근대 유럽에서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발전해왔어요. 공판중심주의는 밀실이 아닌 법정에서, 판사가 법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판결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고인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변론할 권리를 갖게 되죠. 특히 현재 영미권 국가 대부분은 공판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07년에 도입
공판중심주의 도입 이전에 우리나라 형사재판은 '조서재판'이라고 불렸습니다. 판사가 수사기관이 제출한 자료(조서)를 바탕으로 재판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판사로 임용돼 일을 시작한 2006년만 해도 법정이 아닌 판사실에서 검사가 제출한 서류들을 검토하는 일이 형사사건을 맡은 판사의 주 업무였습니다.
조서재판은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법원의 업무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할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판사 또한 피고인이나 증인을 직접 마주 보고 그들의 진술이 믿을 만한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죠. 무엇보다 경찰관이 수사 과정에서 강압적인 태도로 피의자나 참고인의 진술을 받아내거나, 진술을 왜곡해서 조서를 작성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사기관이 범인 잡기에 몰두한 나머지 피의자 인권에 소홀해진다는 지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고치기 위해 우리나라에도 2007년부터 공판중심주의가 실시됐습니다.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여러 조항들도 형사 소송법에 신설됐어요. 공개된 법정에서 재판을 하고(공개재판원칙), 피고인이 재판에서 하는 진술을 고려하고(구두변론주의), 증인을 법정에 출석시켜 그의 증언이 믿을 만한지 직접 판단(직접심리주의)하는 것 등이지요.
이로써 형사재판 절차의 핵심은 수사 기관이 작성한 '조서'가 아닌 판사가 이끌어 가는 '재판'으로 변하게 됐습니다.
법원 업무 과중, 재판 지연 문제도
그러나 최근엔 공판중심주의 제도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됩니다. 우선 현재 약 3000명 수준의 판사 숫자로는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기에 무리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예컨대, 경찰이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목격자들에게 진술을 받아 재판에 증거로 제출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피고인이 진술 자료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피고인 입장에선 수사기관이 목격자들의 진술 내용을 왜곡해 조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수사는 비밀리에 이뤄지기 때문에 목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선 피의자에게 반대 신문을 하지 않거든요.
이럴 경우 법관이 진술 자료를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선 목격자들을 법정에 소환해 직접 증언을 들어야 해요. '공판중심주의'에선 법관이 재판에서 증언을 듣고 확인해야 증거로서 효력이 생기니까요. 만약 이 사건 참고인이 100명이나 되고 이들이 진술한 내용을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법원은 이들을 다시 법정으로 소환해 증인 신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법원의 업무가 지나치게 과중해집니다. 판사 수가 한정적인 상황에서 한 재판에 쏟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다른 재판들까지 줄줄이 지연되는 문제도 나타나지요. 재판이 지연되면 피해자들의 고통도 커지게 됩니다.
수사기관의 노력이 빛이 바랠 우려도 있습니다. 수사 초기 관계자들의 진술이야말로 신빙성이 높다고 볼 측면도 있는데 이것을 피의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증거로 쓸 수 없게 되니까요.
공판중심주의를 실행하면서 불거진 여러 문제점에 대해서는 제도적인 보완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진실 발견'이라는 형사재판의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방안은 과연 무엇일지 다같이 고민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 ▲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스틸컷. 영화에서 경찰들은 범인 검거에 몰두한 나머지 범인으로 의심되는 유력한 용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합니다. /CJ ENM
- ▲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까지 했던 중세 유럽 법정을 그린 삽화예요. 당시 고문은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여겨졌어요.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돼요. /아이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