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7년 전쟁서 英에 패배한 프랑스, 전략적으로 美 독립 지원
입력 : 2024.11.27 03:30
군사조약들
- ▲ 지난 6월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한 후 악수를 하고 있어요. /로이터 뉴스1
이처럼 러시아와 북한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상황이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군사조약은 전쟁을 불러오거나, 세계 질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거든요. 오늘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군사조약들을 살펴볼게요.
프랑스와 군사동맹 조약, 미국 독립으로 이어져
1778년에 체결된 프랑스-미국 동맹 조약은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사동맹이에요. 당시 신생국인 미국과 유럽 강대국인 프랑스가 협력해 많은 이를 놀라게 했어요. 두 국가는 어떻게 동맹을 맺게 됐을까요?
프랑스는 영국과의 7년 전쟁(1756~ 1763)에서 패배한 후 캐나다 지역 등을 뺏기며 국제적 입지가 좁아졌어요. 한편 영국은 7년 전쟁 이후 전쟁 비용을 메꾸기 위해 식민지 미국에 설탕세, 차(茶)세 등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이에 크게 반발하고 있었죠. 이때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면 영국의 세력이 약화될 거라 판단했습니다. 영국과의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사·경제적 지원이 필요했던 미국을 도와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죠.
1776년 미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영국에서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후 프랑스에 위원단을 파견해 동맹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했죠. 미국이 새러토가 전투(1777)에서 영국에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는 미국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군사동맹을 적극 추진합니다. 그리고 양국은 1778년 우호 통상조약과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을 독립국으로 공식 인정하고, 미국이 독립할 때까지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지요.
프랑스는 미국에 무기, 탄약, 군복, 해군 병력 등을 지원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해군 함대는 1781년 체서피크 해전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했어요. 이어 프랑스·미국의 연합군이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영국은 항복을 선언했죠. 이후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답니다.
프랑스의 참전은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게 만드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미국 편에 섰고, 이로 인해 영국은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독립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프랑스는 막대한 군사 지원으로 재정이 크게 악화됐어요. 이로 인해 프랑스 정부는 세금 인상을 단행했고, 이는 1789년 시민들이 일으킨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됐지요.
2차 세계대전을 가능하게 한 독소 불가침조약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인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독소 불가침조약'에 합의합니다. 양국의 동맹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어요. 당시 독일은 소련의 공산주의를, 소련은 독일의 파시즘을 비난하며 서로를 적대시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양측은 전략적으로 조약을 체결했답니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와 영국, 동쪽의 소련을 동시에 상대하는 양면 전쟁을 피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독일은 조약 덕분에 서부 유럽과의 전쟁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은 조약을 통해, 언젠가 있을 독일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증강할 시간을 벌고자 했어요. 독소 불가침조약은 공개 조약과 비공개 밀약으로 구성돼 있었는데요. 독일과 소련은 밀약을 통해 양국 사이 완충 지대인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했지요.
그 결과 독일은 소련 개입 걱정 없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어요. 이에 폴란드를 보호해주기로 약속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며 동부 지역을 점령했지요.
그러나 독일과 소련의 평화는 일시적이었어요. 나치 독일은 유럽에서 자신들의 세력이 공고해지자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했기 때문이에요.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렇게 체결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끝나버렸답니다.
공산주의 세력 견제하기 위한 조약도
1951년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 조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일본의 군사·정치적 관계를 규정한 중요한 협정입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1952년까지 미국 연합군의 간접 통치를 받았어요. 그러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반공주의 진영의 핵심 국가로 육성하기 위해 일본과의 안보 협력을 원했지요. 더군다나 1950년에는 6·25전쟁까지 발발해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더욱 커졌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경제·군사적 중심축으로 삼아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려 했지요.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성장을 이루고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답니다.
1951년 9월 8일 2차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연합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고 이와 함께 미일 안보 조약이 체결됐어요. 일본은 자국 내 미군의 주둔을 허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군사적 방위를 미국에 의존하며 경제 발전에 집중해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냉전 기간 동안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요.
일본 국민 중 일부는 미군 주둔과 주권 침해 문제를 우려하며 해당 조약에 대해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에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군사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당 조약을 개정한 것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지요. 하지만 미일 안보 조약은 오늘날에도 양국 관계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보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 ▲ 1778년 프랑스와 미국이 군사동맹조약 등을 체결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이 조약은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 의회 도서관
- ▲ 1939년 8월 23일 소련 외무장관이 독소 불가침조약에 서명하고 있어요. 뒤에 독일 외무장관(뒷줄 왼쪽에서 셋째)과 소련 스탈린 서기장(뒷줄 왼쪽에서 넷째)이 서 있어요. /워싱턴 국립 공문서관
- ▲ 1960년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미일 안보 조약이 개정됐어요. 이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어요. /마이니치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