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는 왜 중국 배경 오페라를 썼나

입력 : 2024.11.25 03:30

오페라 '투란도트'

2003년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투란도트’의 한 장면이에요. 중국 영화 감독 장이머우가 연출을 맡아서 화제를 모았어요.
2003년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투란도트’의 한 장면이에요. 중국 영화 감독 장이머우가 연출을 맡아서 화제를 모았어요.
올해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서거 100주기입니다. 12월엔 '서부의 아가씨'(5~8일·서울 예술의전당), '라 보엠'(20~21일·대구오페라하우스), '투란도트'(22~31일·서울 코엑스) 같은 푸치니의 오페라들이 공연을 앞두고 있어요. 그 가운데 푸치니가 남긴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는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이에요. 과연 이탈리아 작곡가는 어떻게 중국 배경의 오페라를 쓰게 됐을까요.

원작은 페르시아 서사시

'투란도트'가 탄생한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흥미로운 역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페라에서 투란도트는 중국 황제의 딸이지만, 정작 원작은 12세기 페르시아 서사시예요. 당장 투란도트 공주의 이름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을 일컫는 '투르'의 딸이라는 뜻입니다. 이 서사시에는 일곱 명의 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 투란도트와 얽힌 수수께끼가 포함되어 있지요.

이탈리아의 카를로 고치(1720~1806)와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 같은 유럽 작가들이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희곡을 쓰는 과정에서 배경이 중국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페라에서 투란도트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모두 맞히는 남자와 결혼하겠지만 만약 하나라도 틀리면 참수하겠다'는 엄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왕자들은 페르시아·타타르 등 중앙아시아 출신이에요. 오페라만 보면 왜 목숨을 내걸고 멀리 중국까지 오는지 의아하지만, 작품의 탄생 배경을 보면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답니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오역

이 오페라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테너의 아리아가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입니다. 얼핏 제목만 보면 사랑에 빠진 공주가 번민하는 것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탈리아어 '네순(Nessun)'은 영어의 '노바디(Nobody)'에 해당해요. '도르마(dorma)'는 '잠자다'라는 뜻의 단어 '도르미레(dormire)'에서 비롯했고요. 이 때문에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뜻이 되지요.

오페라를 보면 남자 주인공인 칼라프 왕자가 세 가지 수수께끼를 모두 풀고서 투란도트와 결혼할 자격을 얻지요. 하지만 이 오페라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칼라프 왕자도 거꾸로 공주에게 '자신의 이름을 맞히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고 제안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한 대대적인 탐문이 벌어지지만, 칼라프 왕자는 "승리는 내 것(Vincero)"이라고 호기롭게 선언합니다.

이 아리아에서 칼라프는 "공주 당신도 차가운 침실에서 사랑과 희망으로 떠는 별을 보고 있으리"라고 노래합니다. 공주 역시 밤잠을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결과적으로 운치 있는 번역인 셈입니다. 특히 이 아리아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루치아노 파바로티·플라시도 도밍고·호세 카레라스의 '3대 테너 콘서트'에서 불리면서 세계적 인기를 얻었지요.

작곡가의 미완성 유작

클래식 음악사에는 작곡가들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미완성 유작들이 적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나 브루크너 교향곡 9번 등이 대표적이지요. '투란도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후두암으로 투병하던 푸치니는 칼라프 왕자를 연모하는 시녀 '류'가 애절한 아리아를 부른 뒤 죽음을 맞이하는 3막 중반까지 쓰고서 결국 눈을 감았지요. 3막의 마지막 이중창을 비롯해 미완성 대목은 후배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1875~1954)가 물려받아서 완성했습니다.

1926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명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이 오페라가 초연될 당시 푸치니의 절친한 동료였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는 3막 가운데 류의 비극적 죽음에서 지휘봉을 내려놓은 뒤 관객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페라는 끝납니다. 마에스트로(거장)께서 여기서 펜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대체로 알파노의 완성판을 연주하지만, 간혹 이탈리아 현대음악 작곡가 루차노 베리오(1925~2003) 등 다른 작곡가가 완성한 버전으로 공연하기도 합니다.

중국에선 공연 금지되기도

오페라의 배경인 중국에서는 정작 오랫동안 이 오페라를 볼 수 없었습니다. 중국 당국에서 공식적인 금지령을 내린 적은 없지만, 중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았지요. 잔혹하게 남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공주부터 전제주의적 지배에 시달리는 군중까지 이 오페라에도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시각을 일컫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녹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1949년 공산화 이후 문화혁명의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서양 오페라 전체가 금기시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투란도트'는 1990년대 들어서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했지요.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감독 장이머우(張藝謀)가 연출하고 주빈 메타가 지휘한 1998년 베이징 자금성(紫禁城) 공연입니다.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의 '5월 음악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300여 명, 그리고 중국 배우·무용수 600여 명 등 유럽과 중국의 협력을 통해서 탄생한 초대형 공연이었지요. "베이징 사람들아. 포고문을 들어라"라는 1막 첫 장면부터 베이징 한복판에서 역사가 그대로 재현되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공연 이후 한국에서도 야외에서 초대형으로 열리는 '운동장 오페라'가 봇물 터진 듯 쏟아졌지요. 한때 금기시됐던 '투란도트'가 어느덧 중국의 문화적 자신감을 반영하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 올해 그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토스카’ ‘라 보엠’ ‘나비 부인’ ‘투란도트’ 등 많은 오페라가 공연됐어요.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 올해 그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토스카’ ‘라 보엠’ ‘나비 부인’ ‘투란도트’ 등 많은 오페라가 공연됐어요.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월드컵이 열린 1990년 ‘3대 테너’가 콘서트를 열고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어요. 왼쪽부터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호세 카레라스, 지휘자 주빈 메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이탈리아 월드컵이 열린 1990년 ‘3대 테너’가 콘서트를 열고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어요. 왼쪽부터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호세 카레라스, 지휘자 주빈 메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유니버설뮤직코리아
김성현 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